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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일본 생존기
제목 [일본]일본 생존기 등록일 2011-06-14 04:31 조회 10152
작성자 신현경

 

출발하기 전날에도 이것저것 챙기고 준비한다고 2시쯤 잠든 것 같다. 다음
날, 출국하는 날이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국제전화카드를 신청하고 준비했다. 사실 실감이 안 났다. 오히려 막상 그날이 다가오니깐 태연해진 느낌이라고나할까? 이것저것 준비해서 나갔다. 아침 출근시간이라 그런가? 화명동 나가는길은 좀 분주하기도 하고 2시간 전에 도착 못 할까봐 무지 걱정했는데, 화명동을 빠져나오니 금방이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탑승권을 받았지만, 짐이 집에서 쟀을 때 23㎏ 정도라 더가지고 가야 할 것들을 대충 챙겨 갔는데 결국 오버차지를 내고 33㎏를 들고가게 되었다. 그 덕분에 탑승권 받는 그 창구에서 가방을 얼마나 열었다 닫았다 했던지. 사람도 많았는데 조금 부끄러웠다. 공항에서 대기하는 동안 사실할 일이 없어서 시간이 안 간다고 생각했는데, 여러 사람과 연락하는 사이에 어느 새 훌쩍 시간이 흘러가있었다. 좀 일찍 들어가도 되는 건데 딱 10시 10분 맞춰서 들어가서 검색하고, 휴대전화를 정지시키니 바로 탑승시간이었다. 나의 자리는 40A, 이 자리가 날개 쪽 자리라 또 시야를 가린다. 어쨌든 이렇게 혼자 떨어져서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비행기 안에서 간간히 들리는 일본어를 들으니, ‘내가 일본으로 가는구나!’ 하고 실감이 나면서, 그동안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거라든지 우리 가족들이 생각나면서 눈물이 나왔다. 뭐랄까, 내가 스스로 돈 벌어서 이렇게 혼자서 일본 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다는 게 기적 같고 대견하기도 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이제 드디어 부산과도 한국과도 잠시만 안녕!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 먹고 화장실에 다녀오니 벌써 도착이다. 근데 문제는 나리타엔 지금 비가 내린다는 슬픈 소식. 33㎏짜리 큰 캐리어에 10㎏짜리 캐리어를 양손에 들고 어깨엔 노트북 가방 메느라, 비가 와도 우산을 쓸수 없는 비극적인 상태라 흘러내리는 게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모습이 될까봐 걱정하면서 리무진 버스표를 늦게 끊어 1시간 정도 기다려 이케부쿠로 행 버스를 탔다. 시내에 들어가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그렇게 한 시간을 달렸을까 비가 내리는 창밖으로는 일본의 고층 건물들이 보이면서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물론 나는 그들과 똑같이 살지는 않겠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저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참 열심히 산다. 기숙사 관계자 분을 만났다. 그렇게 차를 타고 기숙사 안내를 받고 집에 들어왔는데, 맙소사! 진짜 집이 작다. 예상은 했지만 진짜 놀랐다. 방 안에 들어와서 이것저것 꺼내고 하다가 심심하기도 해서 나가서 길이나 익혀보자는 생각으로 무작정 나갔다. 완전 조용한 주택가라서 주변에 슈퍼도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이다. 역은 보이지도 않고, 일본에 온 첫날. 사실 여기가 한국인지 일본인지 모르겠다. 집 안에서는 한국인이랑 같이 사니깐 한국말 쓰고, 밖에 나가도 사람들 생김새가 별반 차이가 없으니깐 그다지 다른지 모르겠고, 그냥 낯선 동네에 와 있는 느낌? 좀 있다가 집에 돌아갈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마음이 편해져서 그나마 다행이다.


다음 날 아침부터 엄청 일찍 일어났다. 룸메이트 언니가 7시 반에 나간대서 지하철역까지 나가는 길을 모르니 같이 가보려고 따라 나섰다. 역까지는 꽤 멀었다. 어떻게 구청에 가야 할지, 난관이었다. 어느 역에 있는지도 모르고 표 사는 것도 몰랐다. 다행히 역무원이 친절해서 직접 나와서 표 사는 것까지 알려줬다. 하나의 역에 두 가지의 다른 열차가 들어온다는 것부터 엄청 신기했다. 지하철을 타고 네리마 역에 내리니 친절하게 구청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많아서 쉽게 찾아갈 수 있었고 모르는 건 직원한테 물어보고, 외국인등록증이랑 국민건강보험도 만들고 구청 옆에 있는 우체국에 가서 통장 만드는 것까지 완료. 카드는 2주 뒤에 온다니까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도 심심하기에 근처의 네리마 도서관까지 가서 회원증을 만들고 좀 돌아보다가 나왔다. 헤이와다이(내가 사는 동네)로 돌아가려고 전철을 탔는데 내가 탄 열차는 준급행이라서 내가내릴 역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었다. 결국 세 정거장 정도를 지나서 내려 한참을 역에 앉아 있었다. 다리도 아프고,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그런지 힘들기도하고 이런 바보 같은 내 모습에 자책도 되고, 완전 지쳐 있었다. 다시 정신 차리고 반대편으로 가서 전철 타고 헤이와다이로 오긴 했지만 아직 내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요절복통 구직활동 본격적인 구직활동에 나서야 하는데 불안하고 무서웠다. 일본 가게에 전화해서 뭐라고 해야 할지, 그리고 그 사람이 이야기 하는 걸 알아들을 수 있을지, 그리고 외국인이라고 거절당하는 것이 무서웠다. ‘타운워크(일본의 구직 잡지)’를 보다가 인터넷 응모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밑져야 본전이니 이거라도 해보자’라는 생각에 이곳저곳 응모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연히 연락이 올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할 일도 없고 오늘도 뭔가를 해야지 내 맘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그러다 약속이 있어서 나왔는데,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전화번호라 이상하게 생각하고 받았는데, ‘모시모시’ 이런다. 아까 내가 응모했던 모스버거에서 전화가 왔다. 언제가 좋은지, 일은 언제하고 싶은지를 묻는데 일요일과 심야를 제외하곤 언제든지 괜찮다고 의욕 충만한 목소리로 ‘하이’를 연발했다. 면접은 7월 9일 5시 30분 네리마 역의 모스버거. 떨린다. 물론 면접을 봐야 알겠지만, 잘 됐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찬밥 더운밥 따질 때는 아니지만, 시급이 850엔이다. 면접은 혹시나 모스버거 네리마역 점을 못 찾을 까봐 무려 한 시간 반이나일찍 나갔는데, 정작 네리마 역을 나가자마자 모스버거가 있었다는 게 황당 그자체이었다. 어쨌든 50분 정도 일찍 가서 계속 시원한 대합실에 앉아 있다가 면접 10분 전에 찾아갔다. 누구를 찾아가면 되는 건지 물어봤는데, 저쪽 입구 앉아 있으라고 한다. 이윽고 어떤 사람이 자기가 점장이라면서 다가오길래 무조건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하지메마시떼, 신현경또모우시마스(처음 뵙겠습니다, 신현경이라고 합니다)” 이러면서 인사했더니, 자기 이름을 알려주면서 인사한다. 이력서를 꺼내서 보여주고, 그 사람이 면접지 같은 걸 주면서쓰라고 한다. 이름, 주소, 언제 일할 수 있는지 등등. 완전 황당한 건 거긴 유니폼을 입는데 아직 근무가 결정이 되지 않았는데 대뜸 사이즈부터 쓰라고 한다. 그런 건 채용이 결정되고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닌가, 이것저것 말해주는데 일본에서 시급 850엔이면 엄청 적은 편이고, 게다가 다른 데는 다 나오는 교통비가 안 나오는데 괜찮겠냐고 물어본다. 당연히 안 괜찮으니 난 무리라고 말했다. 내가 너무 솔직했던 걸까? 일단 내일 9시까지 기다려보라고 한다. 아직 면접 볼 사람이 몇 명 더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안 될 것 같았다. 어쨌든 기분이 개운치 않다. 게다가 돌아오는 길에 표를 끊고 개찰구에 들어가려고 하니 역무원이 큰소리를 치고 있다. 아직까지는 일본어를 잘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지만, ‘무슨 일이 있구나’ 하고 직감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내가 타고 환승해야 할 세이부 이케부쿠로 선에서 인신사고(人身事故, 사람이 선로에 뛰어내려 자살하는 것)가 일어났단다. 그래서 내가 환승하는 역으로는 운행하지 않고 이케부쿠로로 가서 환승하라며 무슨 교환권 같은 걸 준다. 가뜩이나 기분이 개운치 않은데 이런 귀찮은 일까지 생겼다. 기다리던 면접 결과 통보!!!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는데 사실 핸드폰 통화 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안 들려서 앞에 말은 다 못 알아들었고, 뭐라 뭐라 하는데 또 못 알아들었다. 근데 마지막엔 ‘모우시와케고자이마센(죄송합니다)’라고 하는데,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일본 와서 정말 말로는 괜찮다고 하는 게 많지만 정작 난 하나도 안 괜찮은 것들뿐이다. ‘아, 아마 어제 면접 봤던 그곳이구나!’라는 걸 직감으로 알아챘을 뿐. 면접에 떨어졌다!!! 또 다른 곳의 면접. 8시에 데니스 면접이 있어서 6시 40분쯤 집에서 나갔다. 어둑어둑해지는데 나는 이제야 집을 나가고, 면접에 떨어진 한 번의 경험때문에 가는 길이 그렇게 가볍진 않다. 지하철을 타러 내려갔는데 차가 늦게온단다. 면접 시간에 아슬아슬 할 것 같다. 환승하러 가는데 시간에 쫓긴 나머지 표를 넣고 찾아가지도 않고 그래서 안내소에 물어서 다시 표를 받고 뛰어서 또 전철을 타러 갔다. 다행히 면접 장소인 스가모 역까지는 4분밖에 안 걸렸다. 물어서 나오니 다행히 바로 데니스가 보인다. 그제야 가슴을 쓸어 내린다. 15분 정도 빨리 도착해서 5분 동안 주변을 어슬렁거린 끝에 10분 전에 도착했다. 주말이라 그런가? 가게는 만원 상태. 직원에게 면접 보러 왔다니 점장에게데려다 준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이력서를 보여주니, 자사 양식의 이력서를 또 쓰라고 한다. 긴장한 나머지 한자도 생각 안 나고, 결국 아는 대로 최선을 다해 썼다. 일본어가 부족하긴 한가 보다. 뭐라 하는데 사실 반만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듣겠다. 내가 못 알아듣는 기색을 보이자. “와카리마스까(알겠어요)?” 이렇게 물으면서 쉽게 설명해준다. 친절한 일본인이지만, 속은 알 수가 없다. 여하튼 면접에 떨어지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내가 일본어도 잘 못하고 일본도 엄청 불경기니 같은 돈이면 이왕 자기 나라 사람 쓰는 게 아닐까. 솔직히 내 외모가 일본인이 싫어하는 외모인가 생각했는데, 그건 확실히 아닌것 같다. “에가오가스테키데스데(웃는 얼굴이 예쁘군요)”라며 칭찬을 해주었고 내가 긴장한 모습을 보이자 긴장하지 말라고도 해준 걸 보면 말이다. 근데 내가 면접을 보러 간 가게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2달 후에 오픈하는 다른 지점 오픈 스텝을 뽑는 거란다. 어쨌든 무조건 일하고 싶다고 했다. 13일까지 기다려보란다. 지난번보단 덜하지만 그래도 잘될 것 같지는 않다. 면접을 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울었다. 눈물이 나왔다. 한방울 떨어지니 계속 나온다. 집에도 가고 싶고 여기서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계속 집에만 있어야 하는 내 모습도 싫고,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다. 처음엔 신기 하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다 되겠지’라는 생각과 다르게 정작 잘 안되니, 답답한 마음만 커진다. 결국 낙방이다. 그 후에도 오다큐 백화점의 식품코너, 신주쿠의 덴동집 면접도 줄줄이 봤건만, 기쁜 소식이 없다가 드디어 일하게 됐다. 한국 레스토랑이다. 그동안 고민하고 마음고생 했던 것들이 한 순간에 다 풀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일본 와서 어떻게든 혼자서 해보고 싶었는데, 아는 분께 소개를 받아서 긴장된 마음으로 전화를 하고, 그 후에 담당자 분이 직접 전화를 해주셨다. 그렇게 면접일을 잡고, 면접을 보러 갔는데, 당연히 채용 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결론은 일하게 되었지만, 그래서 계약서도 쓰고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것도, 주의사항에 대해서도 들었다. 한 달 동안 안 되던 일이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되니깐 좋으면서도 느낌이 얼떨떨한 게 실감이 안 난다. 요령을 모르는 특유의 성실함으로 잘 뽑았다고 생각하게 만들겠어!

미타카 교류협회의 볼런티어 신청

일본에 왔지만, 정작 일본인들과 말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길 물어보는 거 빼곤). 그렇게 매일매일 집에 있는 게 싫어서 나이에 관계없이 일본인 친구를
사귀기 위해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를 들고, 미타카까지 갔다. 무려 환승을 두
번이나 해서. 미타카 역에서 3번째 신호까진 잘 찾아갔는데, 아무리 봐도 미타카 국제교류협회는 안 보인다.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찾아서 도착! 일대일 일본어교습 신청서와 1,000엔을 내고 나가려고 하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학생이냐고 물어보신다. 그러다가 할아버지 선생님의 학생이 오기 전까지는 괜찮다고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일본 와서 일본인이랑 나눈 가장 긴 대화였다. 나도 좋은 선생님과 빨리 수업하고 싶다. 하지만 적어도 2~4주는 기다려야 했다. 한 달 후 8월 14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다나카라는 50대 후반의 여자분이었는데, 앞으로 나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주실 분이었다. 미타카의교류협회에서 만나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수업할지 이야기했는데, 문법이나 그 외의 일본어 공부보다 회화 위주로 했으면 좋다고 말씀드렸다. 일본어 공부는 이미 한국에서 3년 정도 하고 왔으니, 실제로 일본에서는 실생활에서 쓰는 일본어를 익히고 싶었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 아침 10시에 만나서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실제로 이 활동이 매주 지속되었고 마치 엄마처럼 내가 힘들어할 때 격려해주시고, 같이 걱정해주시고, 내가 기쁜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해주셨다. 늘 나에게 자기 친딸 같다고 말씀해주셨다. 나도 다나카 씨를 어머니처럼 의지하고 일본의 어머니날에 선물과 편지를 드렸더니 정말 감동하셨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올 때 다나카 씨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나때문에 한국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언젠가 한국에 나를 만나러 오시겠다고 했다. 감동이다.

네리마 구청의 볼런티어
구청에 갔을 때 국제교류회가 있다는 공지를 본 적이 있어 네리마 구청에서 주최하는 국제교류회에 갔다. 약속된 시간은 2시였는데 난 1시 반에 도착해서 혼자서 10분 정도 시간을 보내다가 40분쯤에 동관 501호 회의실로 올라
갔다. 아직 시간이 안 돼서 그런지 3명 정도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많
은 사람이 오고, 다들 즐거워하면서 이야기를 하던 중에, 내 쪽으로 이구치 토
오루 씨가 왔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한국영화를 볼 기회도 많고
한국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곧잘 한국어도 잘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
던 중에 나미키 씨가 나를 부른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갔더니, 그 테이블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인 헤이와다이에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서로 다들 반가워서 이야기를 하다가 구청 직원이 가라고 가라고 사정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이와다이에 사는 아야코 씨가 차를 갖고 오셔서 같이 차를 타고 돌아오게 되었다. 꿈 같았다. 내가 일본인의 차를 타고 있다니! 이건 일본에 와서 꿈에도 생각도 못한 일인데! 그리고 나서 그냥 집에 가려고 했는데 아야코 씨가 자기 집에 들어가자고 해서 얼떨결에 들어가고, 아야코 씨의 집에서 아야코 씨의 어머니인 이즈미코 씨와도 인사하고 차까지 얻어 마셨다. 그리고 다음 주에 하나비(불꽃놀이)가 있다고 같이 가자고 해서, 좋다고 약속까지 하고, 집까지 아야코 씨가 데려다 주셨다. 지금까지 없었던 일본인과 친구가 되고, 차도 타고 돌아왔다. 집에도 놀러가고, 다시 만날 약속까지 하고, 기분이 좋았다. 정말 나이와 상관없이 일본에서 좋은 친구를 만들어서 좋은 사이가 되고 싶다. 일본의 여름 하면 바로 빼놓을수 없는 것이 바로 하나비이다. 지난 주 교류회에서 사귄 아야코 씨가 같이 하나비에 가자고 해서, 나는 룸메이트 언니를 부르고 아야코씨는 나미키 씨를 불러서 넷이서 주먹밥을 준비해 아야코 씨의 차를 타고 하나비를 보러 갔다. 8시부터 시작이라 배고파서 주먹밥과 수박을 먹으면서 기다렸다. 하나비는 참 예뻤다. 부산에도 해마다 10월이 되면 광안리에 불꽃축제가 있는데 정작 한국에선 한 번도 안 가봤으면서 일본에 와서 이런 걸 볼 줄 이야. 터지는 불꽃이 어두운 밤하늘은 수놓고, 마치 까만 하늘에, 꽃이 피는 듯한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들 정도 이었다. 다들 감탄하고, 박수까지 치고, 나도 감탄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좀 심각해졌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네팔 아이들이 폭죽을 만들다가 폭발해서 온몸에 화상을 입고도 계속 노동을 착취당하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터트리는 폭죽을 일본에서 만들었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그 아이들의 수고 덕분에 나를 비롯한 잘 사는 일본 국민들은 하나비의 예쁜 모습을 즐길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 질 수밖에 없었다. 아야코 씨와는 집이 가까워서 자주 만났다. 나이를 초월해서 친구가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라고 느낄 만큼, 자연을 좋아하는 아야코 씨 덕분에 가을에는 사이타마 현의 지치부까지 가서 단풍을 보며 함께 사진도 찍고 이야기도 나누고, 여름엔 반딧불을 보러 갔다. 어머니인 이즈미코 씨와 함께 사는 아야코 씨는 나중에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집에 못 돌아오게 되셨을 때, 가족이 없어서 너무 외롭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가족이 있는 내가 부럽다고, 친구였던 나마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어버리면 너무 외로울 것 같다고 이야기해줬다. 한국으로 오기 하루 전날에도 짐을 정리하는 것도 도와주시고, 마지막 날 잘 곳이 없던 나에게 기꺼이 잘 곳을 제공해주셨다. 일본인들은 깍쟁이라서 웬만큼 친하지 않으면 집에 놀러 오라고 하지 않는다는데 난아야코 씨와 정말 친했던 것 같다.

본격적인 Working
드디어 그렇게도 일하고 싶었던 내가 일을 시작하는 날. 본사에서 1시간정도의 교육을 받고 매니저로 추정되는 분과 함께 내가 일하게 될 유라쿠초 점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갔다. 가게 문 열기 전에는 청소부터 이것저것 준비를 한다. 12시 1시 사이에는 주문이 물밀듯 밀려온다. 아직 일본어도 완벽하게 할 줄 모르는 나는 손님 대응은 무리라서 숟가락, 젓가락, 컵만 씻고 있다. 아마도 평생 내가 씻을 숟가락, 젓가락 컵은 다 씻어본 것 같다. 어쨌든 나도 빨리 일이 익숙해져서 주문도 받을 수 있고, 손님이 묻는 것에 착착 대답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면 좋겠다. 점점 시간이 지나자 나 역시 일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서빙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 일을 하면서 내가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몸이 힘들고 피곤해도 손님에게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한 달쯤 해서 일이 몸에 익을 때쯤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일을 하는 건 기쁘지만, 점장과 직원 1명을 빼곤 한국인밖에 없고 손님들을 상대할 때에는 정해진 말만 사용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기껏 일본에 왔으니 일본인과 함께 일하고 싶었다. 열심히 타운워크를 뒤진 끝에 드디어 내 힘으로, 그것도 일본인이 사장인 초밥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사실 면접을 볼 때 겨우 3명 뽑는데 이력서는 엄청 쌓여 있고, 내가 될지 안 될지 모른다고 해서 꿈에도 기대를 안 했다. 연락이 없어서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하고 또 타운워크를 찾아 열심히 다른 곳에 응모하고 있었데, 합격했다는 이야기 없이 근무 시간을 짜야 하니 다시 연락 달라는 음성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전화를 해 다시 방문 약속을 잡았다. 내가 그 3명 중에 한 명으로 뽑힌 것이었고, 계약서까지 썼다. 난 너무 궁금해서 날 왜 뽑았냐고 물었더니 활력이 넘쳐 보여서 뽑았다고 했다.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 바쁘고 힘들어지겠지만 힘낼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들과 일하는 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물론 말이 안 통하는 것도 있었고, 정말 기분이 안 좋았던 것은 역사 왜곡! 일본인 3명과 나 혼자 일한 적이 있는데, 어쩌다가 전쟁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것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나는 역사가 전공이라 평소 그 부분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그곳에 내 편은 없었다. 거기있던 일본인들은 신사참배는 나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오히려 자기들이 배웠던 역사를 나에게 강요할 뿐이었다. 너무 답답하고 내 편이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결국, 우리가 배운 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고 결론 내렸지만, 내 마음속에는 복수심이 활활 타올랐다.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라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한국에서 돌아가면 열심히 공부해서 올바른 역사를 가르칠 것이라고, 이것이 우리가 이기는 방법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여러 가지 악재 속에 초밥집이 문을 닫게 되었다. 사실 엄청 손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한 달 동안 일한 월급을 받지 못한 채 가게가 문을 닫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동안 힘들게 일한 월급을 떼이는 게 아닌가, 이러면 법적 투쟁까지 가야 하는 게 아닌가, 난 외국인이라서 불리할 텐데…. 별별 생각을 다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하고 이야기도 해봤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 사장이 약속한 날짜까지 기다렸다. 약속한 날짜에도 돈이 들어오지 않아서 전화해서 따졌더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다. 사실은 그때부터 반은 포기한 상태 였는데 어느 순간 입금이 되어 있어서 기쁘기도 하고 놀랐다. 한국 같으면 가게가 문을 닫으면 가장 먼저 돈 떼이는 것이 기본인데, 일본은 가게 문을 닫더라도 임금을 먼저 챙겨준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다시 저녁엔 한가해졌다. 그리고 이때부턴 순조롭게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있었다. 일본에 온 지 3개월. 어느 정도 일본 생활도 익숙해지고, 일본어 잘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이번엔 세븐일레븐 편의점이다. 그리고 정말 내또래 일본인들이 많이 모인 곳이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손님들과 응대하는 말은 정해져 있었지만,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내 또래라서, 쉽게 친해지고 일본어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특별한 경험- 교과서 이벤트, 한글 가르치기
우연히 아는 사람을 통해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국의 역사와 관련된 것인데, 이왕이면 역사 전공한 사람이 좋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한 단체에서 전쟁을 경험한 나라들의 역사교과서를 비교해서 토론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한국 대표가 된 것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초밥집에서 겪은 역사 왜곡 이야기를 했다. 초밥집에서 이야기 할 때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도 않고 그저 무시만 당했는데, 이곳에 모인 일본인들은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신사참배와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대해서 사과해주었다. 세븐일레븐에서 같이 일하다 보니 친구들이 많이 생겼는데 그중에서 사이토 씨가 나에게 한국어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교과서를 같이 골라달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수업을 해달라고 했다. 일본어로 가르치는 한국어는 정말 특별했다. 이때까지 나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에 부딪혀보기도 하고, 한국어를 모국어로서의 한국어가 아니라 외국어로서의 한국어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한글을 떼는 자식을 가진 엄마의 심정처럼 매주 사이토 씨가 읽을 수 있는 글자의 수가 많아질수록 나도 보람도 생기고, 뿌듯해졌다. 민간 외교 사절이 이런 것일까?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여전히 일본을 잊을 수가 없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남들이 하지 못했던 특별한 경험도 많이 했었다. 여전히 눈 감으면 내가 살던 신주쿠 구의 거리가 생생하다. 스스로 나의 워킹홀리데이를 평가하자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나는 일본어가 목적이라기보다 독립하고 싶었기때문이다. 과연 가족을 떠나서 얼마나 내 힘으로 잘 살 수 있을까 내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좋은 일본인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일본이라는 나라는 역사적으로는 악감정이 있을지라도, 그 나라에 살고 있는 그들은 역시 나와 같은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들을 통해서 나는 일본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고 배울 수가 있었고, 그들은 나를 통해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한층 더 가깝고 새롭게 볼 수 있었다고 말해주었다.일본에서 겪은 경험들을 통해서 전공인 역사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것이 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대해 물어왔을 때 아무 대답도 못 하는 것만큼 부끄러운 것이 없는 것 같다. 일본에서의 1년, 이 경험을 토대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한국 을 제대로 알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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