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홀리데이

워킹홀리데이

외교부 워킹홀리데이 인포센터|체험수기|[일본]4번의 이사 속 워킹홀리데이

HOME

워홀러들의 소중하고 재미있는 체험담을 공유하는 공간입니다.

[일본]4번의 이사 속 워킹홀리데이
제목 [일본]4번의 이사 속 워킹홀리데이 등록일 2011-06-14 03:46 조회 10619
작성자 서지나

 

내가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우선 단순히 교환유학시
절의 달콤했던 꿈을 다시 한 번 꾸고 싶다는 욕심에서였고, 두 번째는 일본어
능력을 좀 더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었고 마지막 이유는 그냥 자유롭고 싶은마음, 즉 ‘도피’였다. 바꿔 말하면 ‘아무 목적 없음’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껏 다섯 식구 중 막내로 응석받이로만 살아왔다. 그런 나 자신의 나약함을 이겨내고 강해지고 싶었다. 혼자서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이, 성별, 국적 등에 관계없이 무언가에 도전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발을 내딛지 않는 한, 발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신념을 모토로 나는 다시 한 번 일본행을 결심했다. 단, 이번에는 교환유학 시절처럼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고 단지 비자만 발급되는 워킹홀리데이였다. 이 비자에는 연령제한이 있다. 기본적으로 18세에서 25세까지의 젊은이들만을 대상으로 한다. 20대의 젊은이들에게 모두 똑같이 1년이라는 시간과 자유를 쥐어준다. 그 기간 내에 참가자는 각기 다른 자기만의 색으로 그 1년을 꾸며나간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선에 서 있는 젊은이들이 1년을 어떻게 만들어갈지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도록 하는, 어떻게보면 마치 한편의 성장영화를 보는 듯한 그런 비자이다. 지금부터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려 4번의 이사를 감행했던, 내게 일어났던 그 많은 일들에 대해 간단히 써보고자 한다. 한국에 돌아온 지 반년이 지난 지금, 어느새 해이해져 가는 나를 다시 바로 잡으며 동시에 앞으로 워킹홀리데 이에 도전할 많은 젊은이들을 응원하고 싶다.

하나코가네이의 낡은 아파트
2009년 3월 26일, 나는 도쿄의 고다이라시에 자리한 하나코가네이라는, 도
쿄지만 도쿄스럽지 않은, 정겨운 분위기의 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방은 현지에서 구하지 않고 한국에서 인터넷을 통해서 알아보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4번이나 이사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흔해빠진 명언이 있듯이, 젊은 시절 경험했던 실패는 어차피 돌아보면 그저 웃음이 나오는 추억이 된다. 그곳은 한국인 유학생의 명의로 되어 있는 2DK의 허름한 아파트로, 명의는 유학생의 명의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사는 것은 나, 그리고 마찬가지로 인터넷을 통해 집을 구한 어학원을 다니는 4살 아래의 룸메이트였다. 집에 도착한 첫날부터 경악을 금치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방은 사진으로 본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나는 일부러 방이 두 개로 나뉜 집을 택했었는데, 방은 공교롭게도 두 개가 이어져 있었다. 즉, 내 방에서 부엌,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룸메이트의 방을 지나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건 방이 따로 있다기보다 한 방 안에 파티션을 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방을 계약할 때 그런 설명은 물론 들은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계약금 등에 관해서도 뭔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룸메이트 동생과 성격이 잘 맞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함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일본 생활을 즐겼고, 서로 격려하며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함께 놀기도 하며 그 문제 많은 집에서도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었다. 나는 모아둔 돈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바로 구해야만 했다. 일본어는 대학 때부터 공부했고 유학 경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도착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인터넷으로 응모한 곳에서 면접을 오라고 연락이 왔다. 재일교포 사장이 운영하는 파견업체 같은 곳이었는데, 하네다 공항에서 유명 화장품 브랜드의 단기 향수 프로모션 아르바이트였다. 단기지만 잘 끝낸다면 앞으로도 다른 일을 부탁하겠다는 말에 나는 최선을 다해 면접을 보았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러던 중 응모했던 다른 곳에서도 연락이 왔다. 신오쿠보에 위치한 한국회사로, 한국어 기사 번역 및 홈페이지 관리 등 사무직 아르바이트였다. 작은 회사였지만 한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곳으로 연예 매니지먼트 관련 업종의 회사였다. 나는 한국에서 연예기획사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쪽 일이 앞으로의 경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결국 면세점 일을 거절하고 한인회사 아르바이트를 선택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직원이라고는 한국 남자 4명이 전부였던 그곳에는 나와 또 다른 여자 유학생인 ‘나래’라는 아르바이트생이 있었고,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직원들은 사장을 포함해서 모두 서로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상당히 가까운 사이인 듯 했다. 근무시간에도 허물없이 반말과 온갖 욕들이 난무했으니. 그러던 어느날, 그곳에 국장으로 있는 남자가 신오쿠보 역 앞의 어느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느 유학생 카페에서 그곳이 악덕업체로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월급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끝내 급여를 다 받지 못한 채 귀국한 학생들도 있는 듯 했다. 달력을 보며 계산해보았다. 나보다 먼저 들어온 나래는 이미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고 나도 슬슬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하지만 회사 측에서는 그때까지 월급날은커녕 금액에 대해서도 확실히 알려주지 않은 상태였다. 이야기를 꺼냈더니 사장은 자신이 월급을 떼어먹거나도망갈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우리에게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했다. 하지만 아무리 날짜가 지나도 급여는 입금되지 않았다. 내가 일을 한 지 한 달 반 정도가 지났고 다른 친구는 이미 두 달 정도를 채운 상황이었다. 더는기다릴 수가 없어 어느 날 저녁, 외근을 핑계로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는 국장에게 연락을 했다. 할 말이 있으니 사무실로 좀 와달라고 했지만 국장은 가게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5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의 사무실에 약 세 시간 정도 후에야 나타났다. 결국 우리는 얼굴을 붉혀가며 지금껏 쌓아왔던 불만들을 털어놓고,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어 일을 그만둘 것이니 지금까지 일한 급여를 달라고 요구했지만, 국장은 회사에 돈이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했다. 그런 당신도 지금 급여도 못 받고 근무하고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돈이 없는 상황에서 왜 아르바이트를 고용했는지도. 이건 무슨 한국에서 TV에서 보던 ‘사장님 나빠요’도 아니고, 왜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은 채, 급여를 언제 받을 수 있는지, 아니 받을 수는 있는 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차를 내리고 철로 옆으로 난 골목을 따라 걸어가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이러려고 큰소리치고 온 것이 아니었다. 고작 그런 회사에 들어가서 급여도 못 받고 질질 짜려고 도쿄에 온 것이 아니었다. 내가 꿈꿔왔던 도쿄생활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급여는 결국 약 한 달간에 걸쳐 2회로 나누어 받을 수 있었다. 사장은 우리에게 돈을 줄 테니 나오라고 불러놓고는, 사실은 돈을 다 모으지 못해서 한사람 분밖에 준비를 못했다고 말했다. 나래는 내게 먼저 받으라고 양보를 했지만, 방값도 제대로 못 내는 상황인 것은 서로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는 반씩 받기로 결정했고, 나머지 반은 다음에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 돈은 한참 뒤에서야 받게 되었고, 이것으로 그들과의 악몽 같은 인연을 끝낼 수 있었다. 돈은 다행스럽게 모두 받았지만 어쨌거나 돈을 못 받았던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나는 이미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헛되이 흘려 보냈었다. 나는 그 한 달간을 매일 같이 집에 멍하니 앉아서 보냈다. 그저 집에서 인터넷을 하며 이래저래 살 궁리를 찾아 헤매고, 룸메이트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저녁에는 산책을 나가서 바람을 쐬며 앞으로의 걱정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내 생애 그렇게 우울한 나날이 또 있을까 싶다. 어쨌든 그렇게 두 번에 걸쳐 받은 급여는 이미 그 한 달 동안 야금야금 써버린 상태였으니 도쿄의 높은 방값을 지불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만이 수중에 있었고, 이미 나는 도쿄에서 인간에 대한 불신감이 생겨 다시 일어설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도쿄라는 도시가 싫어졌다. 신주쿠의 넘쳐 나는 인파들도 지긋지긋했다. 도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쉬는 날에는 시부야에서 쇼핑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것은 서울에서 회사를 오가며 주말에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뭔가 새로운 경험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앞으로도 겪을 일 없을 그런 것. 아니, 사실 그런 건 다 그저 변명이고 솔직히 말하면 방값을 낼 돈도 없었다. 나는 ‘리조트 아르바이트(일본에서는 줄여서 ‘리조바’라고 부른다)’를 찾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리조바는 숙식을 제공하는 곳들이었기 때문에, 숙식 걱정은 필요 없다는 장점이 있다. 그저 일할 수 있는 젊은 몸뚱이만 있으면 된다. 무일푼의 젊은 나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어차피 도쿄에는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6월 15일, 그렇게 도쿄를 떠나 기후 현의 다카야마 시에 있는 북알프스의 온천여관으로 떠나게 되었다.

오쿠히다의 조용한 여관에서 나카이가 되다
그곳은 기후 현의 북알프스 산맥에 자리한 ‘오쿠히다’의 깊은 산 속에 있는 온천 여관이었다. 장을 보기 위해 슈퍼까지 가려면 산 속을 한 시간 이상을 걸
어야 하고, 그 한 시간 동안 사람이라고는 한두 명 정도밖에 볼 수 없으며 가끔은 곰이나 원숭이가 내려온다는 그런 곳이었다. 여관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산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로프웨이도 있었다. 하절기 단기 아르바이트로 여관으로 온 것은 나를 포함해서 오구치 씨, 그리고 동갑내기인 가나라는 아이 이렇게 여자 세 명이었다. 물론 외국인은 나혼자였다. 우리의 업무는 ‘나카이’라는 것으로, 일본 전통여관에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 세 사람과 남자직원 중 겐지라는 아이를 빼고는 다들 아줌마, 아저씨 혹은 할머니들이었다. 그중 나카이들의 우두머리를 맡고 있는 ‘오츠키’라는 할머니가 우리 세 사람을 총괄하고 가르치는 역할이었다. 나는 이런 여관 같은 곳에는 나이 드신 분들이 많으니, TV에서 보던 ‘인심좋은 할머니’를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어르신을 비난하고 싶은 맘은 없지만, 여관에 계신 어르신들은 ‘인심 좋은 할머니’와는 거리가 멀었다. 무슨 말만 했다 하면 다음날이면 온 여관 전체에 소문이 퍼져 있었고, 할머니들끼리 우리에 대해서 무언가 쑥덕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어른으로서의 ‘너그러움’이나 ‘따뜻한 인정’ 따위는 느낄 수 없었다. 그때서야 언젠가 사람들이 ‘나카이는 성격이 좋지 않다’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스트레스도 많고 그것을 부하에게 풀기 마련이다. 일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일본어이니, 아무리 일본어로 먹고 살아온 나라고 해도 못 알아듣는 단어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음식을 놓을 때에는 젓가락 위치 하나도 틀려서는 안 되고, 코스로 나가는 요리들의 이름부터 난생 처음 보는 재료의 이름들, 요리법까지 외워서 손님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하나하나 선배들의 설명을 들을 때마다 메모장에 메모를 했고, 쉬는 시간에는 그것들을 외우곤 했다. 우리는 오츠키 씨에게 매일 같이 온갖 납득가지 않는 이유로 혼나야만 했다. 어른이 된 후 누군가에게 그렇게 혼나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았다. 손님 앞에서는 늘 무릎을 꿇어야만 했기 때문에 무릎은 시커멓게 멍이 들어, 무릎을 꿇고 앉을 때마다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매일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지금까지 외운 것들을 롤플레잉을 통해 테스트를 하겠다고 오카미상(여관의 여주인을 지칭하는 말)이 선언했다. 나카이 업무는 일본인들도 힘들어 하는 직업인 만큼, 물론 외국인인 나에게는 사실 더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내세울 생각은 없었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일을 하려면 외국인은 두배로 힘든 것이 당연하다. 만약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일을 못한다면 일본인을 고용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외국인을 고용할 이유는 없다. 나는 일하면서 적어둔 쪽지를 달달 외워서 롤플레잉 테스트에 보란 듯이 통과했다. 인간이 세상에 못할 일이 어디 있을까. 스스로 안 하는 거라면 몰라도. 여관의 아침은 항상 조용했다. 일은 보통 아침 6시부터 11시, 오후는 3시부터 8시 반 정도에 끝나기 때문에 아침 5시쯤에 일어나야 했다. 이른 새벽부터 잠에서 깨어나 사원 기숙사를 나오면 맑은 북알프스의 공기가 나를 반겨주었다. 워낙 산 속이라 그런지 기온차가 심해서 아침에는 늘 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TV에서나 볼 법한 전형적인 일본 전통여관의 모습을 한 실내에서는 늘 눅눅하고 오래된 듯한 그리운 냄새가 났다. 조용한 여관 로비에 있는 창가에 걸터앉으면 보이는 것은 산을 빼곡히 채운 나무들뿐이었다. 그곳에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런 오쿠히다의 풍경이 좋았다. 같은 아르바이트생인 동갑내기 가나와는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해주며 어느새 친구가 되어 있었다. 일할 때에도 서로 힘을 합해서 해결했고, 함께 쉬는날이면 가나의 차로 드라이브를 하고 근처의 도야마 현이나 나가노 현으로 놀러 다니며 ‘홀리데이’를 맘껏 즐겼다. 일이 끝나고 밤 늦게는 항상 함께 온천을 했다. 깊은 산 속 여관에서 북알프스의 풍경을 바라보며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온천을 하는 것은 하루일과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마치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우리가 일을 한 지 한 달이 되고급여를 받았을 때, 우리는 북알프스를 떠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우리가 왔을 때부터, 아르바이트 공고에 씌어 있던 내용들과 조건이 너무 달랐다. 공고에는 분명 하루 8시간 근무에 일당 8천 엔이라고 씌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 근무시간은 하루 10시간을 조금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관 측에서는 우리에게 1개월은 수습 기간이라며 하루 10시간 근무에 7천 엔을 지불했다. 수습 기간에 대해서는 공고에는 전혀 씌어 있지 않았다. 또한 이 깊은 산 속에 여관이라는 좁은 인간관계 역시 문제가 많았다. 슬슬 오츠키 씨에 대해 불만이 나오던 우리 신입 세 사람은 오카미상을 찾아가 불만들을 털어놓았다. 결국 그 이야기는 나중에는 여관 전체에 다 퍼져나갔고,오츠키 씨와의 관계도, 모든 관계가 다 무너지고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결국 급여와 그 외 인간관계의 문제로 약 한 달 만에 여관을 그만두게 되었다. 사실은 여기서 그냥 모두 접어버리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 당시,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나를 제외하고 다 같이 발리로 여행을 떠났다. 나 혼자 이런 산 속에서 무슨 고생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고, 이미 도쿄에서도 한 번 겪었던 좌절을 다시 한 번 겪은 것 같아 다음 갈 곳을 정하는 것도지쳐서 힘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느 한 가지도 이뤄내지 못한 채, 이렇게 우울하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급하게 인터넷으로 수도권에 거주할 곳을 찾았고, 사이타마에 있는 개인이 운영하는 여성 전용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여관을 떠나기 전 이사 가는 곳 근처의 아르바이트를 알아보았고, 미리 전화를 해 면접을 잡아두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일이 쉽지가 않다고 들었기 때문에 민첩하게 행동에 옮겨야만 했다. 가만히 여유를 부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짐을 챙기고 베란다 너머로 익숙해진 오쿠히다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직 26살이고, 이 정도로 포기하는 마케이누(싸움에 진 개. 패자라는 뜻)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비자가 내게 쥐어준 1년은 이런 것이다. 스스로 누구의 도움 하나 없이 홀로서기를 해내는 것. 중도하차를 해버리면 지는 것이다.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된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여행도 다니며 마음껏 워킹홀리데이를 누릴 테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는 기후 다카야마 발- 도쿄 신주쿠행 버스에 올랐다. 여관에서 받은 급여 단 16만 엔을 손에 쥔 채. 사이타마의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 출발한 지 약 5시간 만에 신주쿠에 도착했다. 한 달 동안 산 속에 있다가 복잡한 도시에 나오니 기분이 묘했다. 산에 있을 때는 전혀 몰랐었는데 도시에 나와 보니 새삼 지금이 한여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7월의 찌는 듯한 무더위가 내게는 왠지 모르게 낯설기만 했다. 바로 전차를 타고 게스트하우스를 향해 히가시우라와 역으로 갔다. 역에는 주인아저씨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게스트하우스는 평범한 2층짜리 가정집이었고, 수도권인데도 불구하고 밭과 논에 둘러싸여 거의 시골 같은 동네였다. 방은 약 6개 정도였고 한국인 3명과 일본인 1명, 그리고 주인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분명 여성 전용 게스트하우스라고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덩치 좋은 주인아저씨는 그 집에 들어와 살고계셨다. 혹시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전혀 기분 나빠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듯했고, 오히려 저녁이면 다 같이 거실에 모여 아저씨가 손수 요리하신 음식들을 즐겁게 먹곤 했다. 나 역시 얼마쯤 지나고 나서는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않게 되었다. 우선 주인아저씨에게서 전혀 그런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이런 이상한 이해관계도 있을 수 있구나 하고 새삼 느꼈다. 방은 생각보다 넓었다. 낡은 다다미로 10조 정도의 방이었는데, 전형적인 전통 일본식 방이어서 어쩐지 음산한 기운까지 느껴졌다. 침대와 커다란 액정 TV등이 놓여 있었는데, 놀랍게도 방값은 한 달에 3만 5천 엔이었다. 도쿄에서 멀다는 것과 집이 낡았다는 것 등을 고려하면 놀랄 만큼 싼 가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주쿠까지 30분이면 나갈 수 있었고, 꽤나 맘에 드는 조건이었다.1층에는 나와 일본 여자아이의 방이 있었고, 주인아저씨와 나머지 한국인3명의 방은 2층에 있었기 때문에, 1층은 늘 조용한 편이었다. 나는 개인주의가 심하기 때문에 한집에 살고 있다고 해도 그다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다. 되도록 혼자 사는 것처럼 지내고 싶었다. 나는 며칠 뒤 기후에서 돌아오기 전에 잡아두었던 면접에 갔다. 집 근처 역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카페였는데, 나는 실수로 다른 지점으로 면접을 갔다가 잘못 왔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제대로 된 지점으로 갔는데, 이미 시간은 많이 늦어 있었다. 미리 말은 해두었지만 그래도 역시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 후 나는 닥치는 대로 인터넷을 뒤져가며 여기저기에 이력서를 내고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며칠 뒤 두 군데서 면접을 오라고 연락을 받았다. 한 곳은 한국인 사장이 운영하는 인터넷 통신판매 회사로, 고객을 상대하는 오퍼레이터 아르바이트였다. 그리고 다른 한 곳은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아담한 이탈리아 요리 전문점이었다. 면접은 통판회사가 2시에 음식점이 5시였다. 나는 우선 꼬박 한 시간 반을 걸려 통판회사로 갔다. 회사는 의외로 규모가 큰 편이었고, 면접관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두 명 다 일본인이었다. 사장이 한국인이지만 아무래도 직원은 일본인이 많은 것 같았다. 자기소개를 했더니 그들은 일본어를 너무 잘한다며 놀라워했다. 그리고 몇가지 질문을 한 다음, 노트북을 가져와서 일본어 타자테스트를 시켰다. 나는한국에서도 일본어로 근무하는 양이 더 많았기 때문에 타자는 웬만한 일본인들보다도 빠른 편이었다. 면접이 끝나고 이탈리아 요리점에 가는 길에 통판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7월 말쯤부터 출근해달라는 연락이었다. 그 뒤 이탈리아 요리점은 떨어졌지만 어쨌든 나는 도쿄로 돌아온 지 약 1주일 만에 료고쿠 역에 위치한 통신판매 회사에 출근을 하게 되었다. 시급 1,100엔이라는 나름 높은 급여의 오퍼레이터 아르바이트가 시작되었고, 나는 판매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판매부는 놀랍게도 나를 제외하고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나의 주요 업무는 고객들에게서 오는 문의 메일에 답변하고 클레임 등을 해결하는 일이었다. 아르바이트생들을 관리하는 사람은 ‘시로타’라는 남자로, 그는 젊은 나이에 스킨헤드로 머리에 늘 두건을 쓰고 있었다. 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일을 하면서 조금씩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과장으로 ‘이토’라는 여자 상사가 있었는데, 그녀는 늘 나를 보살펴주고 마치 동생처럼 대해줬다. 그 외에도 같은 아르바이트생인 고고 씨, 요시다 씨 등도 모두 잘해주었다. 오퍼레이터는 전화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점심은 거의 한 명씩 따로 해결해야 했지만, 시간이 맞을 때에는 함께 식사를 하며 사적인 이야기도 나누곤 했다. 나는 일에도 점점 익숙해져 평안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1시간 반이나 걸리는 통근 거리를 견디지 못하고 9월 1일 여름의 끝 무렵, 결국 또다시 이사를 결정했다.

타이완남과 와타나베, 그리고 니이가타
이사를 많이 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에 이사를 많이 하는거라고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은 꼭 나의 상황을 가리키는 말
같았다. 그곳은 회사에서 지하철로 약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니시오지마’
에 있는 UR공단으로, 한국인 회사원 언니가 빌린 2LDK의 집이었다. 혼자 살
기에는 넉넉하다며 방 한 개를 내놓은 것이었다. 방은 약 4조에 4만 5천 엔으
로, 사실 지금까지 살아온 방 중에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이었지만 그래도 근무처에서 가깝기도 했고 룸메이트 언니는 냉장고와 가구 등을 주고 먹을 것 등도 나눠주곤 했다. 아르바이트는 그럭저럭 할 만했지만, 가을쯤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신입으로 ‘와타나베’라는 남자가 들어온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는 나와 함께 메일 처리 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싫어도 그와 늘 부딪쳐가며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형적인 오타쿠의 외견을 가진 그는, 모든 업무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았다. 매번 실수의 연속 때문에 손님들에게서 매일 클레임이 들어왔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보통 그가 일을 저지르고 난 다음날 손님에게서 클레임이 들어오고 문제가 생기는데, 그런 날이면 그는 어김없이 휴무였다. 그래서 늘 그가 저지른 실수를 내가 처리하곤 했다. 이토과장에게 몇 번이나 불만을 얘기했고, 과장은 와타나베에게 몇 번이나 말했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그런녀석과 같은 시급을 받고 일한다는 것 자체가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그런 와중에 집에서도 문제가 생겨났다. 같이 사는 언니가 타이완인 남자 친구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일본에서 생활할 때 만났던 그는 타이완에 돌아갔다가 일본에서 취직을 하기 위해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취직이 될 때까지 당분간 이 집에 머물기로 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일주일이라길래 허락을 했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일본어 실력으로 취직이 될 리가 없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지금은 이름조차 잊어버린 그는, 생각보다 순수하고 착한 사람인 듯했다. 내가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무언가 요리를 하며 “지나, 잇쇼니 타베마쇼(같이 먹어요)”라고 웃으며 말하곤 했다. 음식들도 의외로 맛있었다. 딱히 미심쩍은 짓도 하지 않았고, 나를 배려해서인지 대부분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간혹 마주치면 취직이 잘 안 된다는 등의 고민을 얘기하곤 했다. 이렇게 집에서는 타이완남과의 생각도 못했던 동거에, 밖에서는 와타나베가 나를괴롭혔다.
나는 11월쯤 휴일을 연속으로 붙여서 신주쿠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니이가
타로 여행을 갔다. 친구가 니이가타 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 스케줄을 조정해 친구네 집에 약 1주일 정도 신세를 지게 되었다. 니이가타의 ‘소스 가쓰돈’을 먹고, 도키멧세라는 곳에 가서 야경을 보고 니이가타의 특산품인 ‘사사당고’를 먹었다.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하는 친구는 상당히 편안하고 윤택한 생활을 하는 듯 해보였다. 학교를 졸업한 지 이미 3년이 지나 사회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오랜만에 캠퍼스를 누비며 5년 전 규슈에서의 유학생활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물론 즐거운 일들만으로 가득했다. 학교와 기숙사 어딜 가든 친구들이 가득했다. 매일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학교에 좋아하는 남자아이의 이야기를 하기도 하며 걱정 따위는 없는 행복했던 1년이었다. 그에 반해 워킹홀리데이는 온갖 고생투성이었다. 그냥 평범하게 일을 하는것도 힘들 판에 처음에는 악덕주를 만나 고생하고, 궁핍한 생활에 시달리다 산 속 여관으로 가서 힘든 나카이 생활을 하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오고 본의 아니게 타이완 남자랑 동거까지 하게 되고 정말 웃을 수만은 없는 일들로 가득했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유학 시절보다는 이번 1년이 기억에 더 많이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타이완 남자는 돌아갔지만, 옆방 언니는 늘 집에서 주변 사람들을 불러 새벽까지 술을 마셔댔다. 차라리 타이완 남자가 있던 때가 그리워질 정도였다. 물론 그런 불만을 제외하고도 남과 같은 공간에서 산다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오지마로 이사 오고 난 뒤에 계속 생각했던것이었지만, 이런 도심보다는 근교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사이타마의 시골스러운 게스트하우스가 그리웠다. 마지막 두세 달만큼은, 조용히 나 혼자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네 번째 이사를 감행했다. 기타우라와의 원룸 어디서든 늘 그렇듯 방을 구하는 것은 쉽지가 않고 머리 아픈 일이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스트레스 없이 혼자 살겠다는 생각으로 원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이제 와서 각종 보증금 등 초기비용을 부담하면서까지 원룸을 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되도록 초기비용이 없는 집들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런 원룸은 웬만해서 구하기도 힘들었고 여러 가지 조건들이 따르거나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이었다. 그렇게 매일 인터넷을 들여다보며 고민하던 중, 레오팔레스에서 진행하는 캠페인을 알게 되었다. 창립 39주년을 기념한 ‘39(일본어로 상큐, 즉, Thank you) 캠페인’으로, 몇몇 건물들을 캠페인 가격인 한 달 3만 9천 엔에 내놓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룸 쉐어로 사는 것보다 낮은 가격이었고, 더군다나 모든 가전제품이 구비되어 있고 광열비가 포함된 가격이 3만 9천 엔인것이었다. 이보다 쌀 수는 없었다. 나는 당장에 전화를 해서 사이타마 우라와 지점의 레오팔레스로 달려갔고, 방을 보고온 뒤 그 자리에서 바로 70일 계약에 약 10만 엔 정도를 지불하고 사이타마 기타우라와 역에서 버스로 약 7분 거리인 원룸을 계약했다. 드디어 내 인생 26년 만에 혼자서 내 이름으로 계약한 방을 얻은 것이었다. 그것도 외국에서. 나는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바로 다음날 이사를 감행했다. 그 후 나는 계속해서 오퍼레이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쉬는 날에는 아르바이트로 친해진 친구와 함께 요코하마나 가마쿠라와 같은 곳을 여행하며 그야말로 워킹홀리데이를 만끽하며 안정적인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덧 시간은 이미 1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방 계약이 3월 5일까지였기 때문에 나는 5일 날짜로 비행기를 예약하고 아르바이트는 2월 중순에 그만두게 되었다. 내가 그만두는 날, 판매부 사람들은 함께 돈을 모아서 내게 작은 선물을 건네주었다. 그들은 내게 “소 상(서 씨)처럼 정확하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드물다. 7개월간 정말 수고 많았다”며 내게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보람’이라는 것을 낯선 땅에서 낯선 외국인들에게서 느끼게 되었다. 나는 늘 아르바이트를 할 때 ‘소 상’이라고 불렸었다. 비록 발음은 잘못 됐지만 그런 건 전혀 상관이 없다. 중요한 건 그들이 나를 필요로 했고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사실이다. 소 상이건 서 상이건 나를 필요로 해주고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사실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와타나베와는 이미 좋은 말동무가 되어 있었다. 비록 일은 못하는 친구였지만, 당시 한창 동계올림픽에 관한 화제가 사내를 장악하면서 그가 김연아의 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근무 중에 그와 함께 김연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에 대한 분노도 어느새 사그라졌다. 어차피 세상 모든 사람이 일을 잘한다면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 국적과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장단점이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발렌타인 데이를 마지막으로 판매부 사람들에게 작은 초콜릿을 선물로 돌리고 모두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건네고 회사를 나섰다. 그렇게 2월 중순, 나의 ‘워홀’은 끝을 맺었고 나는 ‘히토리구라시(독립해서 혼자 사는 것)’를 만끽하며 남은 시간 동안 도쿄를 둘러보고 친구들을 만나면서 지내다가 3월 5일, 모국으로 돌아왔다. 내가 워킹홀리데이를 하면서 얻은 것은 우선 ‘일본어’일 것이다. 나는 내가 원래부터 일본어를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워킹홀리데이 전에 내가 쓰던 일본어가 얼마나 부끄러운 수준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일본어보다도 더 소중한 것들을 너무나도 많이 얻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지만, 우선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는 것, 또한 내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 나 자신을 보았다는 것, 그리고 바로 ‘자신감’과 ‘자립심’이다. 나는 외국 땅에서 혼자 힘으로 1년 동안 의식주를 해결하고 버텨낸 인간이다. 하물며 이 한국 땅에서 내가 못해낼 일이 과연 어디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무슨 일이든지 해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근거는 없지만. 나는 한국에 들어와서 바로 일본과 관련된 행사 기획 일을 하다가 약 3달 만에 그만두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일단은 일본어를 쓸 수 있다고 해서 아무 일이나 하는 것보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사실 나는 지금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 전에 내가 꿈꾸었던 ‘미래의 멋진 내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워킹홀리데이 선배로서 그다지 좋은 롤 모델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조만간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멋지게 해낼 것이다. 그냥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 목록보기

홈페이지 정보이용 만족도 조사

설문시작

워킹홀리데이 인포센터 운영시간 10:00~18:00(토/일/공휴일휴무) 1899-1955

외교부

해외안전여행

호주 Hello 워홀

재외국민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