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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 워킹홀리데이 인포센터|체험수기|[캐나다]꺼지지 않는 성화와 같은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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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꺼지지 않는 성화와 같은 나날들
제목 [캐나다]꺼지지 않는 성화와 같은 나날들 등록일 2011-06-13 12:51 조회 12272
작성자 유지원

 

“여유분 좌석이 있네요. 오늘 그냥 타세요.”
“네? 그냥 내일 가면 안 될까요?”
항공권 발권 부스 앞에서 대기자 권유를 받고 일정을 하루 늦출 생각이었던나는 자리가 남아돌아 바로 비행기에 타야만 했다.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않았던 나는 안내방송과 함께 몸이 붕 떠오르는 기분이 들자 그제야 겁이나기 시작했다. 해외 경험 전무, 비행 경험은 제주도 편도가 유일했던 나의 캐
나다 생활은 시작부터가 남달랐다.

안녕, 워킹홀리데이
  등굣길에 본 설명회 현수막을 계기로 알게 된 캐나다 워킹홀리데이(이하 워홀)는 비싼 어학연수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내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우선 미국과 인접해 있어 표준 영어를 사용하고, 제한 없이 거의 모든 직종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자유롭게 여행하거나 생활할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큰매력으로 다가왔다. 주한 캐나다 대사관에서는 동계 올림픽을 맞아 지원 에세이를 폐지하고 인원을 두 배인 2천 명가량으로 충원해 시기도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결심을 굳히고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처음엔 반대하셨지만 확고한 마음과 철저한 준비 과정을 보여드리자 결국 허락해주셨다. 휴학계를 내고 어학원 등 영어 환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초기 자금을 모았다. 또 학원과 독학을 통해 현지에서 필요한 회화 실력을 쌓아갔다. 서류 역시 빠트리는 부분 없이 차근차근 준비해나갔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나는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돈, 여행, 어학 등 저마다 다른 이유로 워홀을 결심한다. 생활비 마련을 위해 거의 모든 워홀러들이 일을 하고 있지만 집과 일터만을 오가는 생활은 절대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회화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에 가서 실력 향상보다는 배운 것을 얼마나 잘 쓸 수 있는지 확인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나의목표는 무엇보다도 그곳 사람들의 삶과 올림픽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었다. 지구촌의 스포츠 축제라 불리는 올림픽 현장에서 전 세계인이 모여 내뿜을 열기와, 무엇보다도 김연아 선수의 올림픽 출전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도시는 어느 곳이 좋을까? 올림픽이 열리는 도시 밴쿠버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며 빼어난 자연 경관만으로 관광객들을 불러들인다. 온도차가 계절별로 변화무쌍한 동부와 달리 서쪽 해안의 밴쿠버는 쾌적한 기후를 자랑하고, 봉사 일정이나 티켓 구매를 생각했을 때 역시 적격이었다. 나는 올림픽 직후 복학할 것을 생각해 3월 말 출국, 2월 말 귀국 예정으로 왕복 항공권을 구했다. 캐나다에 관한 워홀 관련 서적이나 정보가 부족해 준비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다. 나는 주위에서 어학연수나 워홀로 캐나다에 다녀온 사람들의 경험담, 관련 웹 사이트, 당시 시중에 나와 있던 2권 정도의 책을 샅샅이 뒤져서 나만을 위한 정보를 추려냈다.

좌충우돌 정착기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해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도착하니 예상치 못한 변수가 너무 많았다. 여권 외에 다른 신분증이 없던 나는 신용카드 등 제2의 신분증을 요구하는 은행, 핸드폰 대리점 등에서 생각지 못한 곤란을 겪었다. 내
주 거래 은행이었던 TD Bank의 몇 지점은 필요에 따라 한국인 텔러에게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해놓았지만 영어로 요구사항을 말하고 또 대화로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자신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한국과 달리 일정 빈도 이상으로 입출금을 하거나 카드를 사용하면 수수료가 나가는 시스템은 나를 꽤나당황하게 만들었다. 처음에 내 계좌를 만들어준 은행원은 약관에 없는 프로모션을 해주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는데 나중에 거래 내역을 확인했을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비싼 수수료가 빠져나가 있었다. 나는 당장 은행에 찾아가서 조용히 그러나, 조목조목 따졌고 그는 나를 피하며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우겼지만 결국 내 돈을 돌려주었다. 집을 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한 곳에서 오래 살 경우에는 빌딩 매니저와 직접 계약을 하고 하우스메이트를 구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인터넷 사이트혹은 동네에 붙어 있는 룸메이트 모집 글을 보고 찾아가서 마음에 들면 보증금과 렌트비를 내면 된다. 직접 찾아가 보면 소개와 달리 수납공간이나 개인 공간이 부족할 때도 있고, 테이크 오버 비용(take over, 이전에 살던 사람이 들여 놓은 가구나 주방기구의 값)을 억지로 떠넘기려고도 한다. 유학원에서는 돈을내면 홈스테이를 알선해주기도 하지만 요즘은 이민가정 비율이 높아 현지 문화체험이라는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나는 저렴하면서도 집 상태나 시설이 깔끔하고, 영어 환경이면서도 꼭 필요한 경우를 대비해 한국인 하우스메이트가 있는 집을 찾았지만, 건축 구조상 보온을 위해 깔아놓은 카페트에 기관지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결국 마룻바닥이 있는 집으로 다시 이사했다. 새 집은 바닷가에 가까울 뿐 아니라 채광이 정말 좋아서 한여름에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눈부신 햇살에 잠이 깼다. 해가 질 때쯤 밖으로 나가 해변을 따라 걸으며 붉게 물드는 바다를 바라보는 일은 언제라도 질리지 않았다. 친구 중 한 명은 이사하려고 찾아보다가 인터넷에서 정말 좋은 조건의 집이 나와 둘러본 후 바로 계약했는데, 집 주인은 일본에 휴가를 간다며 집을 비웠고, 얼마 후 사정이 있다며 몇 달치 월세와 테이크 오버비를 선불로 내라고채근했다. 별 의심 없이 달라는 대로 돈을 주었던 친구는 집수리를 부탁하러 매니저에게 갔다가 밀린 3개월치 집세와 공공요금을 내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집주인과 연락을 시도했지만 이미 잠적한 뒤여서, 경찰에도 신고했지만 소용없을 거라고 했다. 날씨 좋은 6월의 어느 날, 나와 하우스메이트들은 친구의 헌 집의 가재도 구를 탈탈 털어 야드 세일을 벌였다. 주말이면 앞마당을 가진 타운하우스 거주자들이 쓰지 않는 물건을 내놓고 싼 값에 파는 것을 야드 세일이라고 하는데 그간 재미있게 구경도 하고 가끔은 필요한 것을 싸게 사기도 했었지만 예정에 없이 우리가 주최자가 된 것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와서 필요한 것이 있나 둘러보고 가거나, 웃으면서 인사나 짤막한 조언을 해주고 갔다. 처음에는 돈 버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팔다 보니 신이 나서 묶어서 싸게 팔거나 덤을 준다던지 해서 망설이는 손님과 흥정도 했다. 마지막에 무거운 가구 몇 점과 TV 등이 남았는데 뒤늦게 합류한 하우스메이트 언니가 중년의 손님에게 파격가를 제시했더니 차를 가져와서 모든 걸 실어갔다. 테이크 오버비인 300불의 반이 안 되는 141불밖에 못 벌었지만 신선한 체험이었다. 친구는 결국 임시로 다른 친구 집에서 몇 주를 지내다 좋은 집에 직접 계약해서 들어갔다. 그후로 주위에서 집을 찾는 사람에게 인터넷에서 비슷한 글을 보면 철저히 무시하라고 조언해주었다.

힘내요, Job seeker
  누구든 워홀로 캐나다에 온 이상 일할 곳을 찾게 된다. 당시 세계적인 경기침체 추세는 캐나다도 예외가 아니어서, 올림픽 특수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는 일자리 찾기가 어려운 시점이었다. 그렇다고 최저임금 이하의 시급을 감수하며 한국 식당에서 일하면 대개 몸이 힘들고 영어를 쓰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부당한 대우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다가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어느 곳이던 ‘준비된 구직자’를 원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력서와 커버레터(자기소개서)부터 심혈을 기울여 작성했다. 이력서에 증명사진을 거의 넣지 않게 되어 있고, 관련된 경력이나 봉사 활동을 중요시하며, 자신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 명확히 나타내도록 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철자가 틀린 이력서들은 ‘정성과 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곧바로 폐휴지함으로 향했다. 매일지도의 한 부분을 정해 구직 사이트에서 본 곳들을 돌아다니며, 가능하면 매니저를 만나서 이력서를 전하고 정중히 인터뷰 약속을 받아냈다. 찾아갔던 곳의 위치와 상호, 연락처, 만난 사람과 인터뷰 여부, 그 외에 기억할 사항 등을 기록해서 나중에 연락이 왔을 때 기억을 못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인터넷에서 미리 뽑아둔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도 열심히 연습했다. 내가 처음 채용된 곳은 캐나다에서 커피와 도넛으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사람 구함’을 보고 들어갔다가 매니저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예상한 대로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는가, 동료와의 갈등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질문이 나와서 여유 있게 답변했다. 며칠 후 채용 결정 전화를 받았는데, 문제는 그 후에 일어났다. 패스트푸드 체인점의 특성상 한가해 보였다가도 손님이 가득 몰려들어 트레이닝을 받을 시간이 빠듯했는데, 매니저는 내 이력서의 경력이 마음에 들었는지 감독직 자리를 생각해서 거의 모든 일을 가르치려고 했다. 나는 샌드위치 하나, 랩 하나에도 선택 사항이 많아서 까다로운 손님 앞에서는 지레 긴장해서 실수를 연발했다. 어느 날 나이 많은 손님이 세트메뉴 주문을 할 때 나는 발음을 알아듣지 못해 같은 말을 4번 이상 반복하게 만들었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손님은 매니저에게 격하게 항의하고 가버렸다. 며칠 후 심각한 얼굴로 나를 부른 매니저가 더 이상 나와 일할 수 없다는 통보를 했다. 나는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사정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집에가는 길에 결국 울고 말았다. 자신감은 곤두박질치고 당장 집에 가고 싶었다.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울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집에서 약간떨어진 베이커리 카페에서 면접을 보았는데, 중국인 사장은 성실하고 손이 빠른 한국, 일본인을 선호해서 쉽게 채용 결정이 났다. 도심에서도 빌딩이 밀집한 구역에 있어 직장인 손님이 많은 곳이었다. 깜깜한 새벽에 개점 준비를 하고 따끈하게 구워져 나온 머핀과 함께 문을 열면 단골손님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샌드위치 외의 다른 메뉴가 복잡하지 않아 가짓수가 많음에도 금방 외울수 있었다. 나중에는 동료들과 호흡을 맞춰서 한 사람이 주문을 받으면 옆 사람은 이미 그릴에 샌드위치를 굽고 있고, 계산대에 있던 사람은 주문 내용을 모두 외워놓아 손님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얼마나 시간을 단축하는가는 일종의 게임이 되었다. 하지만 사장과 매니저와는 항상 문제가 끊이지 않아서, 재료를 덜 넣거나 유통기한이 지난 것도 몰래 쓰려고 하고, 쉬는 시간에 직원들이 먹는 양에 눈치를 주었으며, 직원이 항의를 하면 자르고, 무엇보다 둘 다 기혼자 이지만 신입 직원이 마음에 들면 치근대는 바람에 오래 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근무 시간을 오전으로 바꾸고 다른 일이 구해지기만 하면 그만둘 생각으로 다시 구직에 나섰다. 몇 군데 인터뷰를 하고 오다가 우연히 집 근처의 쿠키가게에 구인 표시를 보고 들어갔는데, 두 사람이 한꺼번에 그만둬서 발등에 불이 떨어졌던 매니저는 인터뷰 후 바로 내게 전화해 같이 일하고 싶다고 했다. 카페에는 그만두고 싶다고 통보한 뒤 2주 정도 더 일하며 신입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바로 그만두었다. 마지막까지 일했던 나의 세 번째 직장은 여러 모로 가장 캐나다답고, 가장맘에 드는 곳이었다. 잉글리쉬 베이 근처에 위치한 이곳은 유명한 캐나다 쿠키체인의 본사 직영 매장으로 위생이나 제품 질 관리가 꼼꼼하며, 칼 같이 지켜지는 쉬는 시간은 물론, 유급 휴가나 명절 보너스 등 직원 복지도 훌륭했다. 무엇보다 명절을 제외하면 빠른 페이스의 가게가 아니어서 트레이닝 시간도 충분했고, 손님들과 눈 마주치며 얘기할 시간도 많았다.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매니저는 나에게 마감 시간의 금고 정산을 선뜻 맡겨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나를 믿어 준다는 게 고맙고 기뻤다. 만족스러운 환경과 충분한 수준의 복지, 좋은 사람들 덕분에 업무 의욕도 능률도 어느 때보다 높은 상태에서 일할 수 있었다. 단점 아닌 단점이라면 매 근무마다 6개씩 제공되는 쿠키가 살로 간다는 것인데,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가게를 열고 갓 구워낸 각종 쿠키를 트레이에 얹어 식히려 창문을 열면 달콤한 냄새에 남녀 할 것 없이 가게로 들어와 구경하다가 자연스럽게 매출로 연결되었다. 바쁜 시즌이 지나면 동료들과 온갖 수다를 떨며 일하는데 1년 조금 넘게 일했다는 독일계 매니저는 나와 나이차이가 그리 많지 않아 금방 친해져 지금도 연락하는 사이로 남아 있고, 〈트와일라잇〉 시리즈 광팬인 고등학생 K는 종교 전도사처럼 제발 나도 보라며 같이 일할 때마다 사정을 했다. 여름에는 가게 앞에서 갑자기 사람이 쓰러져 119를 불러야 하는데 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고, 크리스마스시즌에는 일손이 달려 친구의 친구까지 불러 정신 없이 일했다. 그만둘 때에는 다들 정이 많이 들어 아쉬움에 작은 송별회를 했고, 그 뒤에도 시간이 날 때면 들러서 안부를 묻곤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얻은 것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 그리고 돈보다도 값진 동료들과의 추억이었다.

어학원, Yes or No
  유학생이나 워홀 참가자들은 영어 실력 습득과 문화 체험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꿈에 부풀어 외국 땅을 밟는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뒤
에는 언어의 장벽을 느끼고, 어학원에 등록해 체계적으로 어학 실력을 높이려한다. 자신에게 맞는 학원을 잘 고른다면 부족한 점을 파악해 보완하는데 도움이 되고, 수업 외에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트라이얼 레슨(예약한후 무료로 1회 수업을 들어보는 것)을 받고 내린 결론은 가격 대비 수업의 만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우선 수업에서 가르치는 대화 패턴이 일정한데 실제 회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또 같은 수준의 학생들이 쉬운 단어로만 대화하는 것을 보면서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학원 중에는 빽빽한 시간표로 강의식 수업을 진행하는 곳이 있었는데, 지나갈 때마다 온통 한국말이 들리곤 했다. 주위를 잘 둘러보면 학원 말고도 영어를 배울 기회는 많았다. 장을 보러 갈때, 쇼핑하러 가서 옷을 고를 때나 커피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을 때도 주위 사람들과 쉽게 얘기할 수 있었다. 버스를 탔다가 옆에 앉은 사람이 입고 있는 옷에 대해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다운타운에서 대마초 합법화나 노숙인의 권리를 위한 집회 등이 열리면 사람들과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었다. 옮겨서 살던 집에는 하우스메이트 전원이 한국인이었지만, 모두 사람을 잘 사귀는 성격이어서 친구를 자주 집으로 초대해 같이 식사하며 놀았다. 어느 자리나 시원한 맥주 캔과 칩 몇 개면 친구가 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공항에서 함께한 봉사자 중 한 분은 내가 한국에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하자 “돌아간다고? 나는 네가 그냥 여기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씀해주셨다. 올바른 문법과 풍부한 어휘보다도 ‘부딪치는’ 자세와 끊임없는 연습. 두 가지가 현지에서 성공적인 영어학습의 가장 큰 비결이었다.


Festa! 축제 속으로
  에펠탑 같은 유명한 건축물도, 이탈리아 같이 아기자기한 옛 건축물도 찾아보기 힘든 밴쿠버에는 항상 세계 이곳저곳에서 온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아
그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인기 도시의 비결 중 하나는 연중 끊이지 않는 축제
가 아닐까 한다. 중국인, 인도인, 스페인인 등 다인종 국가답게 지역 커뮤니티
와 이민자들이 중심이 되어 펼치는 나라별 전통 축제에는 흥겨운 춤과 노래가 함께했고 갖가지 전통 음식은 관광객들의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밴쿠버내 여러 곳에서 동시에 열린 국제 재즈 페스티벌의 노상 연주에 연인들과 부부들이 로맨틱한 춤을 추었다. 가을에 열린 국제 영화제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를 비롯한 한국 영화가 당당히 그 이름을 올렸다. 서양의 대표적인 명절인 할로윈과 크리스마스에는 시내의 모든 가게가 장식으로 뒤덮여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새해 첫날에는 잉글리쉬 베이에서 연례행사인 북극곰 수영대회가 열렸다. 우스꽝스럽게 차려 입고 겨울의 차가운 바닷물에 뛰어드는 행사에서 매서운 추위를 찬물로 이겨보려는 기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독특하면서도 알찬 콘텐츠로 차 있는 축제들이 지역 주민의 유대를 다지는 역할을 했고 이민국가에서 서로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었고 해외 관광객도 유치하는 이벤트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덤으로 나는 이런 체험기들을 관련 사이트에 올리다 우수 특파원으로 선정되어 약간의 상금도 받았다.

고마워, 미안해, 잘했어
  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시차 때문에 경황이 없었고 짐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때, 누군가 선뜻 다가와 “혹시 도움이 필요하니?”라고 물었다. 환한 미소로 묻는 모습에 낯선 곳에서의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시내에서 숙소를 찾아갈 때에도 사람들이 도와주겠다고 나서 내 몸만한 이민 가방을 대신 끌어주었다. 건물을 드나들 때면 앞 사람은 다음 사람을 위해 문을 잡고 기다려주고, 지나가다 살짝 스친 사람끼리도 서로 먼저 사과했다. 친구처럼 안부를 묻는 동네 커피숍에서 파는 것은 서비스 이상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초반의 잦은 실수에 비난과 꾸중이 아닌 격려를 받으며 더빨리 일을 배울 수 있었다. “처음인데 너무 잘했어!” “괜찮아. 나도 일한 지 몇년째인데 아직 같은 실수를 해!” 칭찬과 격려를 들으면 풀이 죽어 있다가도 금방 힘이 났다. ‘미안해, 고마워, 잘했어’ 이 세 단어는 꼭 마법의 힘을 지닌 것만같았다. 외국인의 눈으로 본 한국 사람들은 감정 표현에 굉장히 인색하다고 했던가. 무뚝뚝해 보여도 알아갈수록 속정이 깊은 것이 한국 사람이라지만, 표현으로 와 닿는 캐나다인들의 친절과 긍정적 에너지는 외로워지기 쉬운 타지 생활에서 내게 큰 힘이 되었다.


Volunteer 24/7
  ‘캐나다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자원봉사자가 되는 것이다. 자원봉사가 생활화되어 있어 초등학생부터 은퇴한 노인들까지 누구나 행사나 축제 외에도 양로원이나 도서관, 병원에서 시간과 노력을 쏟아 활동한다. 누구에게라도 ‘당신은 왜 자원봉사를 하는가?’고 묻는다면 분명 ‘내 시간을 의미 있고 재미있게 보내기 위해’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맞춤형 자원봉사활동을 찾고 싶다면 인터넷에서는 BC 주 정부나 커뮤니티센터, 혹은 자원봉사자협회 홈페이지에서 기간이나 종류, 적성 등의 옵션을 선택해 정보를 검색할 수 있다. 또, 동네 자원봉사센터나 YMCA, 혹은 일하고 싶은 곳에 찾아가 직접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올림픽 일정이 최우선인나는 단기 엑스포나 축제에 주로 참여하게 되었다. 한 번은 유방암재단의 모금 행사에 미리 봉사자 등록을 해놓았는데, 협회에서 마라톤 대회에 참여할 자원봉사자 모집 메일이 와서 당장 신청했다. 아침 일찍 버스를 대절해 시애틀로 떠난 50여 명의 봉사자들은 베이스텐트를 정리하고 골인 지점인 시애틀 대학 캠퍼스로 이동해서 참가자들의 교통편 안내와 주변 정리를 도왔다. 봉사자들은 마지막까지 분투하는 참가자들을 격려하고 참가자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고생하는 봉사자들을 격려하느라 현장 분위기는 마냥 훈훈했다. 대회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하늘이 너무 예뻐 피곤도 잊고 마냥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날이 하지였다는 걸 생각해냈다. “그레이스, 여름에 해가 가장 긴 날을 영어로 뭐라고 하죠?” “하지Summer solstice라고 하지.” 서서히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던 그날의 하늘은 밴쿠버에서 보낸 1년 동안 보았던 하늘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더 오래 자원봉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Show your heart, play your part
  밴쿠버에 온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올림픽 자원봉사 인터뷰는 5월에야 연락이 왔다. 인터뷰 장소에서 보안 검색대를 지나면 경력, 직업, 거주
지, 선호도 등을 꼼꼼히 체크한다. 우리 선수들을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피겨, 쇼트트랙이 열리는 퍼시픽 콜로세움과 스피드 스케이팅의 리치몬드 빙
상장을 우선순위로 지망하고 인터뷰를 마쳤다. 몇 달 뒤 VANOC에서 ‘축하합
니다! A&D representative로 배정되었습니다’라고 메일이 왔다. 장소는 1시간 반 가량 떨어진 YVR 국제공항으로 ‘Arrival & Departure’는 선수 등 관계자의 출입국 담당이었다. 인터뷰에서부터 오리엔테이션, 유니폼과 출입증 발급, 봉사장 트레이닝까지 자원봉사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오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더라도 좀 더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진행 방법이기 때문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개막식을 한참 앞둔 1월 25일, 나는 첫 근무를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공항으로 향했다. 첫날부터 모인 사람들은 방학을 맞은 대학생, 전 공항 직원과 항공사 직원, 응급구조 요원 등 각자 하던 일 다양했다. 1근무가 10시간이나 되지만 사람들과 친해지고 업무 파악을 하다 보니시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올림픽까지는 시간이 있었지만 미디어 관계자나 스폰서들 때문에 공항의 자원봉사자들은 늘 바빴다. 아침부터 공항의 보안 구역과 국내선/국외선 수하물 구역을 오가며 항공 스케줄의 변동사항을 체크한다. 경우에 따라 픽업 서비스도 제공하며, 고객들의 짐이 무사히 도착했는지 점검한 후 스키 점프나 봅슬레이 등 큰 장비를 사용하는 종목의 경우 경기장 쪽에 보낼 짐에 미리 국가, 종목에 따른 태그를 달아 일반 승객들의 짐과 구별한다. 조심 또 조심했지만 분실 사고는 어쩔 수 없었는지 한 미국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의 짐이 타고 온 비행기에 미처 실리지 못해 다른 항공사 편으로 왔다고 연락이 왔는데, 정작 짐을 받았어야 할 다른 항공사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결국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짐이 도착해 선수에게 보내졌다. 장비 하나하나에 민감한 선수에게나 우리에게나 아찔한 순간이었다. 14번의 일정이 금방 지나가고, 내 마지막 근무일인19일에는 김연아 선수를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다.

Feel the fever! 올림픽
  밴쿠버는 2월이 되자 거의 모든 시공을 끝나고 본격적인 올림픽 채비에 들어갔다. 가게들은 각종 올림픽 기념품으로 특수를 누렸다. 자원봉사자들은 행사 기간 동안 출입증을 보여주면 버스와 지하철을 무료로 탈 수 있어 밴쿠버의 주요 행사에 빠지지 않고 구경하러 다닐 수 있었다. 12일의 개막일에 앞서 10일에 열린 개막식 리허설에도 자원봉사자 특전으로 참가할 기회가 주어졌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가수들의 공연과 아울러 밴쿠버의 역사와 비전, 올림픽 정신을 표현하는 퍼포먼스들이 어우러져 시종일관 눈이 즐거웠다. 개막식 당일에는 집 앞을 지나가는 성화도 구경하고 교대한 성화 주자와 같이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시내에도 볼거리가 넘쳐서, 참가국과 스폰서들의 개성 만점 홍보관과 각종 거리 공연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무료로 개방하는 아이스링크와 집 트랙, 국립미술관은 대기 시간만 7시간이 넘었다. 캐나다의 색인 붉은색과 흰색 물결이 온통 거리를 채운 가운데 종종 반가운 태극기도 볼 수 있었다. 매일 달라지는 메달 순위도 화제였는데 대국인 미국, 중국, 캐나다나 겨울 스포츠 강국인 독일에 뒤이어 한국도 7위로 선전해 굉장히 뿌듯했다. 무엇보다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며 정정당당하게 경기에 임해준 선수들에게는 모두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녀를 만나다
  이번 동계 올림픽에서는 김연아 선수가 한국에 사상 첫 피겨 스케이팅 금메달을 가져다 줄 것인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었다. 그녀의 첫 아이스쇼부터 지켜봐왔던 나는 내 눈으로 그녀의 경기를 꼭 보고 싶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올림픽 티켓 공식 판매에서 나는 기적처럼 단 한 자리 남은 여자 쇼트 경기의1등석 표를 구할 수 있었다! 23일, 경기가 열리는 퍼시픽콜로세움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관객석에는 일본 선수들을 응원하는 일장기가 굉장히 많았지만 김연아 선수를 응원하는 태극기와 배너들도 지지 않을 정도로 많이 있었다.경기가 시작되고, 차례가 다가올수록 긴장감은 커졌다. 갓 시니어에 데뷔한곽민정 선수도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여 프리 진출을 확정지었다. 마지막 그룹에서 일본인 팬들이 밀봉되지 않은 꽃을 빙판에 던져 꽃잎들이 마구 쏟아졌고, 신경이 곤두선 나는 마오선수의 경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점수 발표에 이어 사회자가 “Yuna Kim”을 호명하자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음악이 시작되자 그녀는 우아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동작으로 좌중을 압도했고 실수 없이 완벽한 점프와 스텝은 한껏 고무되어 있던 일본 팀의 기를 단단히 꺾어놓았다. 눈 깜짝할 새 시간이 흘렀다. 예의 007 포즈와 함께 쇼트 경기가 끝나자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고, 당연하게도 그녀는 쇼트 최고점을 기록하며 1위로 올라섰다. 바로 다음 날 귀국한 나는 프리 경기와 시상식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고 결과에 만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끝이 아닌 시작
  그렇게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리움도 서서히 옅어지고 추억은 사진으로만 남았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최선을 다해 살았던 그 시간을 잊지 않고 있다. 장기적인 자원봉사를 해보고 싶은 마음에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청소년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고, 올림픽 자원봉사 경험은 서울시립청소년문화교류센터 홈페이지에 게재해 다른 사람들과
경험담을 나누고자 했다. 영어 공부도 계속해 돌아와서 치른 토익 시험 성적
은 100점 가까이 올랐다. 방학에는 영어캠프 보조교사로 활동했고, 사설 기관
에서 주최하는 영어 말하기 경시대회에서는 장려상을 수상했다. 현지 친구들
과는 싸이월드와 비슷한 ‘페이스북facebook’으로 수시로 안부를 전했다. 한 친구는 내가 다 모으지 못한 올림픽 기념주화 잔여분을 한국으로 부쳐주었다.

  내 삶은 달라졌을까? 영화처럼 모든 것이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나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어제의 나는 비행기가 두려워 해외여행을 포기했지만, 오늘의 나는 보다 넓은 곳으로 나아가는 또 다른 꿈을 꾼다. 나는 달라졌는가? 캐나다 행 워킹홀리데이가 허락해준 10여 개월의 시간 덕분에, 나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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