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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잊지 못할 10개월의 소중한 추억들
제목 [호주]잊지 못할 10개월의 소중한 추억들 등록일 2011-06-14 00:37 조회 12418
작성자 박지혜

 

  워킹홀리데이. 나는 아직도 이 말을 들으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10개월의 짧다면 짧은 기억이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된 시기이기도 하다. 25년을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자 한편으로는 가장 많은 것들을 깨닫게 해준 워킹홀리데이의 잊지 못할 소중한 기억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체험수기를 작성하게되었다. 나의 체험수기가 향후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경험자로서 내가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호주에 가면 무언가 배우겠지?’ ‘최소한 영어는 마스터하겠지?’ 등과 같이 아무 목표 없이 막연하게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생각이라면 차라리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확고한 의지와 철저한 계획 없이 떠난다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것이 워킹홀리데이기도 하니까. 그럼 지금부터 10개월간의 워킹홀리데이 추억들을 하나씩 나열해보고자 한다.

 

Before Working Holiday
“Your application for working holiday visa was approved on24 October 2007.” 드디어 한 달을 꼬박 기다렸던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발급되었다. 비자가 발급되던 날, 나는 곧 호주로 떠난다는 부푼 꿈으로 인해서 뛸 듯이 기뻤다.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예상하지 못한 커다란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바로 ‘부모님의 반대’였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당시, 해외 경험도 전혀 없었던 내가 아는 사람도 없는 호주로 혼자 떠난다고 갑작스럽게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독립한 적 없이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고작 몇 개월의 아르바이트를 해본 것이 전부인 내가 호주에서 일을 하며 살겠다고 하니 부모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런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려움 때문에 값진 경험을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두 달 동안 몰래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호주 유학기관, 워킹홀리데이 클럽, 지인 등을 통해 다양한 정보들을 수집했다. 내가 매일 하루 2시간 이상씩을 투자하여 발로 뛰며 얻은 정보들은 어느새 책 한 권의 분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실제 호주에서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영어 실력은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면서 어느 정도 향상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D-Day가 다가왔을 무렵, 나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호주에서 실제로 활용하는 일만을 고대했다. 그리고 결전의 날이 찾아왔다. 나의 모든 계획들을 구체적으로 문서화하여 부모님 앞에서 발표했다. 나는 모든 계획들을 자세하게 작성했고,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고 돌아오겠다는 의지와 그동안의 준비과정을 설명했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10일 동안 혼자 여행자숙소에서 머물겠다는 것을 겨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지인의 집에서 머무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하고, 나는 가까스로 호주로 떠나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호주로 출발하는 비행기에 막 오르기 전, 아침까지만 해도 흥얼거리며 아쉬운 내색 전혀 없던 동생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울먹이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동생의 “언니, 잘 다녀와”라는 말 한마디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애써 참았던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그렇게 나는 공항에서 아빠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뒤로 하고 출국 수속을 마치자 어디서 강한 마음이 나온 것인지 어느새 나의 눈가에는 눈물이 쏙 들어갔고, 두 눈은비장해졌다. “사랑하는 아빠, 엄마, 그리고 내 동생 지원아, 나 꼭 잘하고 돌아올게!!” 내가 스스로 번 돈으로 해외여행도 하고 외국문화도 체험하고 오겠노라고,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살아보겠다고, 워킹홀리데이를 결심한 지겨우 두 달 만에 무작정 날아간 호주.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나의 10개월간의짧고도 긴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The Moment - 그때 그 순간
호주에서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몰랐을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남들에게 예쁨받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따라서 일을 하면서 실수하는 내 모습도 그저 귀엽게 봐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차갑고도 냉정했다. 호주에서 했던 일의 대부분은 처음 접해보는 것들이었고, 일에 익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어나 인종 면에서도 한계에 부딪칠 때가 많았다. 즉, 세상 앞에서 애교가 통할 거라 믿었던 나의 어린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느끼게 되었다. 호주에서의 생활은 강한 마음가짐과 고된 노력을 통해서만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몸소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어쩌면 호주가 아니라 한국이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쉽게 그만두고 그저 응석받이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과 다르게, 호주에서는 생계를 위해서 일을 그만둘 수 없었고, 처절하게 세상을 실감하는 과정에서 나는 점점 더 성숙해질 수 있었다. 호주에서 사무직을 구하던 중 인터넷 구인구직 사이트에서 ‘personal assistant’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드물게도 이력서를 보고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고, 주소를 따라서 찾아간 곳은 시드니 중심부의 어느 고층에 위치한 회사였다. 중동 사람으로 보이는 실장은 돈을 주는 사람치고는 이상하게 친절했다. 그런데 계약 조건을 확인하니 주인의 집에서 같이 살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boss’가 아닌 ‘owner’라는 단어 자체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나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고 나와 안내 데스크에서 명함을 가져가려 했다. 그러자 그 안내원은 같은 회사가 아니라며 자기도 모르는 회사라고했다. 즉, 사무실만 빌린 유령회사였던 것이다. 만약, 내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계약서에 사인했다면 단 몇 초만의 잘못된 판단으로 노예처럼 주인의 집에 갇혀 살림하고, 일하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아찔한 순간이다. 이때의 경험은 덤벙거리는 나에게 무슨 일이든 자세히 알아보고 계약서를 꼼꼼히 확인하는 습관이 생기도록 해주었다.


Against All Odds - 역경을 딛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여행사에서 3달 동안 일을 했던 적이 있다. 여행 상품을 팔고 예약하는 업무, 회사의 신문 광고의 디자인, 가끔씩 허니문 관광객 가
이드 등 많은 일들을 주로 혼자 맡고 있었지만, 내게 돌아오는 것은 남들에 비
해 훨씬 적은 임금과 잔소리와 구박뿐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지금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면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참기로 했다. 여기서 견뎌내야 내가 진정으로 뭔가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여러 일들을 해보았지만,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기에 계속 참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몇 주의 고민 끝에 나는 ‘환경은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맞지만, 지금 내가 여기 호주에 온 이유는 나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고 경험하기 위한 것이며, 다문화를 체험하러 온 나에게 정당한 임금도 못 받으며 생활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사장이 한국으로 돌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이력서를 출력하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가량의 노력 끝에 호주인이 운영하는 여행사에서 일할 것을 제의받았다. 너무 기뻤으며, 고민의 결과는 ‘성공’이었다. 나는 드디어 내가 원했던 호주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둔다는 나의 말에 한국인 사장의 반응은 의외로 매우 무서웠고, 한국에서 전화상으로 나에게 협박을 하며 위협했다.이에 나는 받지 못했던 임금을 다시 받을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노력 끝에 호주 정부에서 운영하는 워홀러들을 위한 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Working Holiday in Australia’라는 기관을 찾아 회사의 BSB 번호를 기입하고 내가 일을 했다는 해당 증빙서류를 제출하고, 임금체불과 임금미달이란 명목으로 사장을 신고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나는 해당 금액을 모두 돌려받을 수 있었다. 부당함에 맞서 전부 나의 힘으로 이룬 성과여서 그런지 그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Desperate Penniless - 무일푼의 절박함
Hayman Island의 리조트에서 일을 하기로 되어있었던 나는 East Coast에
서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
게 되었다. 당장 일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고용했다는 것이다. 리조트에서 일하면 높은 시급을 보장받으면서 리조트 시설들을 고객처럼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그곳은 최고의 일자리였다. 결국 여행이 끝나고 나는 단기간 동안 지낼 만한 방을 저렴하게 구하고, 직업을 찾아 나섰다. 줄어가는 통장잔고를 볼 때마다 내 마음도 점점 초조해졌다. 나는 무료 직업 중개소의 도움으로 하루짜리 단기 청소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나는 관광정보지에 나온 섬의 리조트에 매일같이 전화를 했다. 돈이 없어 육지에 어렵게 머물고 있다는 사정과 함께 자리가 있으면 바로 나를 불러달라고 간구한 끝에, 나는 드디어 2주 만에 거지 생활에서 탈출했다. 그 당시 나의 통장잔고는 단52달러였다. 그렇게 나는 가까스로 직업을 구해 아름다운 섬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에피소드지만, 그 당시 나의 심정은 매우 절박했다. 부모님의 소중함에 대해 느낄 수 있었으며, 또한 절박한 상황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호주 생활에 대해 조금씩 즐기기 시작했다. 한국에 다시 돌아간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분명 잘해낼 것 같다는 자신감과 함께.

Holiday
내가 워킹홀리데이를 하는 동안 쉬지 않고 일만 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워킹홀리데이를 결심한 이유에는 말로만 듣던 외국문화를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호주에서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들을 많이시도해보고자 노력했다. 내가 가장 행복하고 기억에 남는 순간은 호주인이 운영하는 여행사에서 일을 했을 때이다. 일도 하면서 무료로 여행도 충분히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호주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 많은 만큼 아름다운 곳이 많다. 그 한 예로 그레이트배리어리프Great Barrier Reef는 세계 최대의 산호초이다. 호주의 동해안을 따라 쭉 펼쳐져 있는 이 산호초로의 스노클링이나 스쿠버다이빙은 호주여행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그 외에도 바다를 배경으로 한 스카이다이빙, 해적처럼 배에서만 며칠을 생활하는 세일링 투어, 급류를 즐길 수 있는 래프팅, 호주의 야생동물을 볼 수 있는 동물원 등 나는 호주에서는 다양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 5일간의 훈련으로 얻은 값진 패디 스쿠버다이빙Padi Scuba Diving 자격증은 호주가 남겨준 평생의 소중한 선물이다.


The Party is On - 지금은 파티 중
호주에서 10개월간 있었던 만큼 나는 지인들끼리 갖는 파티, 동료들과의 파티, 여행사에서 일했을 때 여행사끼리 가졌던 공적인 파티 등 많은 파티를
즐길 수 있었다. 여유롭게 음식을 먹으면서 수다를 떠는 파티가 있는가 하면,
시끄러운 음악을 즐기는 파티 등 다양한 파티를 해보았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파티는 배 위에서 했던 파티이다. 세일링 단체투어에 참여한 나는 각자 마실 술을 준비해 오라는 준비물을 보고 막연히 가장 싼 칵테일인 ‘passion pop’을 준비해 갔다. 그런데 그것은 파티를 위한 것이었다. 나의 싸구려 칵테일을 보며 모두들 재미있어 했고, 영국, 프랑스, 일본 등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카드 게임 등 여러 게임을 즐기면서 벌칙으로 서로가 준비한 술을 주고받으며, 마치 해적처럼 음악을 틀어놓고 바다 위를 떠다니며 파티를 했던 것은 정말 특별한 추억이었다.학원이나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친구들과 즐기면서 대화하는 동안 더 많이 영어를 배울 수 있었고, 외국의 문화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또한 바쁜 도시 생활을 벗어나 아름다운 푸른 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었다.내가 경험을 통해 느낀 파티의 팁은 많이 웃고, 상대방에게 질문을 많이 하며 편하게 즐기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즐겁게 들어주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파티의 팁을 평소 사람들과 대화할 때에도 항상 사용하고 있다.


Something Special in AU - 호주만의 특별한 그 무엇
약 10개월 동안 경험했던 호주만의 특별했던 그 무엇을 한번 명사형으로 쭉 나열해보았다. 리프상어, 니모, 바다거북, 엄청나게 큰 물고기 등을 볼 수 있는 세계 최대 산호초, 시골 Bush에서 흔히 발견되는 캥거루, 리틀 캥거루 왈라비, 도시의 불빛이 적은 한적한 장소에서 3분마다 한 번씩 볼 수 있는 별똥별과 촘촘히 별로 수놓아진 하늘, 원래 호주 원주민인 에보리진, 하트모양의 하트리프, 4L짜리 싸구려 박스와인, 풀숲에서 독하게 자란 강한 모기들, 호주 중심부 사막지대의 동굴호텔,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껌처럼 생긴 접착제 블루 껌Blue Gum,오른쪽과 왼쪽이 뒤바뀐 신호등과 교통체계, 마치 사람이 울부짖듯이 우는 다양한 새들, 밤 10시가 되면 클럽으로 바뀌는 평범한 레스토랑, 과일 농장과 다양한 공장들, 더운 여름 시원하게 커피를 공짜로 마실 수 있는 카지노,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손대면 움찔하고 잎을 여미는 신기한 식물, 여행 동무나 카풀을 구하는 여기저기 다양한 포스터들, 울워 Woolworth 마켓에서 싸게 팔던 바나나와 먹으면 더 맛있는 호주의 전통음식인 미트 파이Meat Pie, 육질이 질긴 캥거루 고기, 눈만 마주쳐도 “Hi~!”, 옆으로 스쳐도 “Excuse me~!”, 호주식 인사 “Good day(구다이)!”, ‘그렇지 않니?’라고 뒤에 붙이는 호주식 말“Ay(에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러한 것들을 언제쯤 다시 경험 할 수 있을까? 호주가 내게 남겨준 소중한 추억은 많은 시간이 흘러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Ausie’s - 호주의 사람들
내가 호주에 있는 동안 느낀 또 하나는 호주 사람들이 가장 우리나라 사람
들과 비교되는 것은 바로, 비교문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엄
친아’, ‘엄친딸’과 같은 신조어가 유행할 정도로 남들과 비교하는 문화가 심하
다. 하지만 호주에서는 자신이 공사장에서 일하거나, 택시기사로 일하더라도
자랑스럽게 자신의 직업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인건비가 높은 호주에서는 직업에 귀천이 없을 정도로 일한 만큼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번듯한 직장 없이는 집 한 채 사기 힘든 한국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복지가 잘 되어있는 호주에서는 호주인들의 마음씨 또한 매우 넉넉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호주에서 내가 놀란 또 다른 것은 엉덩이의 절반까지 바지를 내려서 입고 다니는 남성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who cares?’ 자신의 스타일을 당당하게 표현하고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 당신이 진정한 ‘Cool Guy’라는것. 한국과 달리, 호주의 사람들은 자신의 몸매에 대한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다닐 수 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개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모습이 아닐까? 호주에 머물면서 영국, 미국, 호주, 일본, 페루, 중국, 에스토니아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났다. 여행 중 만났던 외국인 친구들, 나의 옆방에 살던 외국인 친구들, 나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 같이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딸 때 만난 친구들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여행 중에 만나는 친구들과 하는 대화는 비슷하지만 같이 여행을 하면서 그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매우 펀fun하다. 체험수기를 쓰는 동안, 내 옆방에 살았던 일본 친구 도모미와 레오미, 영국 친구 아담, 동료였던 마크와 매트, 그리고 룸메이트 머리스와의 참 많은 추억들이 새록새록 기억난다. 함께 수영장도 가고 영화도 보고 쇼핑도 즐기고 항상 일이 끝나면 저녁과 함께 맥주도 한 잔씩 마셨던 일상생활들이 종종 그립기도 하다. 처음 호주에 도착했을 때는 호주인들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면서도 비슷하지만 너무나도 다른 그들의 문화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삶의 태도와 방식이 다를 뿐, 역시나 사람 사는 곳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 호주에 있는 동안 내가 내린 결론이다.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우리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 ‘지구촌’ 그리고 ‘우리는 하나’라는 표현들이 새삼 떠오른다.

After Working Holiday
한국에 도착한 이후에도 나는 한동안 워킹홀리데이 후유증에 시달렸다. 호주에서 내가 배우고, 생활했던 많은 일들이 너무나도 생생하여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며칠 동안은 ‘Jenny’가 아닌 ‘지혜’라는 나의 이름이 어색할 정도였다. 서서히 다시 한국 생활에 적응해갈 무렵, 나는 그 소중한 경험들이 단지 하나의 추억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학교에 복학하고, 호주에서 법을 알아야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낀 나는 밤낮으로 법 공부에 매진하여 민법을 통독했다. 그리고 방학 동안에는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하며, 워킹홀리데이에서의 도전과 같이 또 다른 도전으로 여러 경험들을 만들어나갔다. 대학교 졸업 후에는 좀 더 심도 깊은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고, 현재 열심히 연구에 매진 중이다.회사나 대학원의 면접에서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언제나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것은 바로 ‘10개월간의 잊지 못할 워킹홀리데이의 소중한 경험’이라고 말이다. 나를 한 단계 더 성숙하게 만들어준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도전도 계속될 수 있었다고 말이다. 지금도 힘들고 지칠 때마다 워킹홀리데이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물론 좋은 기억들도 있었지만, 외롭고 힘든 혹독한 나날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나는 다시 힘을 내며 일어설 수 있었다. 호주에서 내가 겪었던 시간들은 앞으로도 내 기억 속에 영원히 남으리라. 체험수기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나는 많은 대학생들에게 워킹홀리데이를 강하게 추천하고 싶다. 그 이유는 그것은 자신에게 여행 그 이상의 무엇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가며 얻는 교훈들은 그 누가 가르쳐주는 것보다 더욱 값지기 때문이다. 워킹홀리데이는 그 자체의 경험이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다. 호주에서 10개월 동안의 경험은 나를 바꾸어놓았고 앞으로 나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큰 나침반이 되어 주었다. 자신의 목표와 의지만 분명하게 갖고 있다면, 워킹홀리데이는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이 글을 읽은 사람이 자신만의 또 다른 유쾌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기를 기대하며 나의 체험수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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