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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더러운 백패커에서 맨 빵을 먹는데 마음은 꽃밭
제목 [뉴질랜드]더러운 백패커에서 맨 빵을 먹는데 마음은 꽃밭 등록일 2011-06-14 01:30 조회 14024
작성자 구희진

 

2007년, 나는 꿈 많은 대학교 1학년이었다. 잡고 싶은 것이 많아 이리저리
기웃거렸지만 꽉 쥔 두 손에 땀 자국만 남아있었다. 대학교 2학년, 미래에 대
한 비전도 꿈도 없이 또 다시 두 학기를 더 보내고 겨울 방학을 맞았다. 영어 공부라도 할까라는 마음으로 자막 처리가 안된 외화 영화를 몇 개 보았는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영화가 한 편 있었으니 바로 ‘버킷 리스트’였다. 두 주연 배우의 노련한 연기만큼 줄거리도 내 마음에 노련하게 꽂혔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 동안 하고 싶은 일들을 리스트로 만들어 실행에 옮기기로 한 두 남자의 이야기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을 살라’는 나의 미니홈피 좌우명과도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치열하게 하고 싶은 일을 실행에 옮기는 것! 영화가 끝난 뒤 나도 희망 리스트를 만들어봤다. 총 44개의 목록이 만들어졌고 그것들을 나에게 중요한 순서로 정리해봤다. 맨 꼭대기에는 ‘1번, 낯선 곳에서 낯설게 살아보기’, ‘2번, 영어를 숨 쉬듯 말하기’, ‘3번, 내가 번 돈으로 해외여행 가기’ 이 세 가지가 올라왔다. 어렸을 때부터 늘 모험을 동경했다. 영어도 좋아했다. 그러나 3번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방학을 맞아 유럽여행을떠난 친구가 부러워서 썼던 것 같다. ‘내가 번 돈으로’라는 부분은 부모님 원조로 해외를 나간 그 친구가 얄밉기도 하고 부러워서 들어간 항목인 것 같고. 워킹홀리데이 가면 되겠네. 상위 3가지를 단기 목표로 정하고 그 다음으로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나의 역량을 알기 위해서 내가 가진 것들을 적어봤다. 젊음, 용기, 영어회화 실력, 전공지식 약간,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아둔 돈 90만 원, 카메라 한 대, 여자 평균보다 우수한 체력, 앵무새 한 마리, 적응력 등등 열 가지 정도를 적었지만 대부분 물질적 재산이라기보다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나의 재산이었다. 낯선 곳에서 살고, 영어를 존이나 톰만큼 잘하고, 해외여행까지 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재산이었다. 몇 날 며칠을 어떻게 해야 할까 끙끙거리다 농담 삼아 친구에게 “존이나 톰을 만나서 영어 공부도 하고 낯선 외국에서 살면서 여행도 다니고 싶은데 돈 좀 꿔줘”라고 했다가 “그럼 워킹홀리데이 가면 되겠네” 라는 대답을 들었다. 고맙다 친구야.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생각나 고민을 나누려고 가볍게 얘기했더니 친구가 1억 장짜리 내 백지장을 들 수 있는 크레인을 알려주었다.

긴 구름의 나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워킹홀리데이 카페에 가입하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일과 관광, 공부를 모두 할 수 있다는 워킹홀리데이 비자, 나라별 정보와 함께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꿈을 꾸고 매년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아 해외로 나가는 수많은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 며칠간 혼자 하던 고민과 마음고생에 위로가 되는 동시에 나도 정말 해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해주는 여러 나라 중 내가 고른 나라는 ‘뉴질랜드’였다. 그곳 원주민인 마오리들은 뉴질랜드를 ‘아오테아로아’ 즉, ‘긴 구름의 나라’라고 부른다. 내 생각엔 마오리들이 ‘밤하늘의 부엉이’ 같은 이름을 짓는 아메리카 인디언들보다 훨씬 더 작명 센스가 있는 것 같다. 이름으로 나의 마음을 한번에 사로잡은 이 나라는 나의 두 가지 부가적인 욕심과도 아주 딱 맞았다. 첫째는 영국식 영어를 배우고 싶었고, 두 번째는 인종차별이 없고 치안이 잘 되어 있어서 여자인 나도 안심하고 마구 모험을 즐길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것. 물론 다른 나라도 치안이 잘 되어 있고 요새 같은 글로벌 시대에는 인종차별이 많이 없다지만 뉴질랜드는 인종평등뿐 아니라 여성평등으로도 유명하고 (일례로 여성을 보호하는 법이 많기도 하지만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이 공사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내가 본 버스 기사의 반 정도가 여성이었다.) 이주민이 많은 다인종 국가인지라 아주 오래전부터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는 문화를 형성해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출국을 위한 준비
‘행선지와 목표가 정해지고 나서부터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라는 말은 소설이나 영화에 흔히 나오는 말. 나도 그렇게 될 줄 알았는데 나한테는 ‘해당사항 없음’이었다. 아주 어릴 때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막상 혼자 힘으로 외국에 가려니 챙겨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카페 회원들 중에는 유학원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는 예산도 부족했고, 이왕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해내기로 한 이상 모든 준비를 스스로 해보고 싶었다. 영문으로 된 비자 신청서를 인터넷 사전을 띄워놓고 하나하나 번역해가기 시작했다. 서울에 있는 지정된 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도 받고 여권도 갱신하고 또 자금을 모으기 위해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를 했다. 여러 가지일이 한꺼번에 벌어지니 정신이 없기도 하고 또 낯선 땅에 대한 설렘 때문에 그렇게 바빴던 겨울방학과 3월이 금세 지나갔다. 뉴질랜드의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매년 4월 선착순으로 신청을 받는데 해마다 신청자가 늘어 경쟁률이 증가하고 작년인 2008년에는 3일 만에 마감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기에 비자 신청 전날 새벽부터 컴퓨터 앞에서 대기를 했다. 비자 신청이 시작됨과 동시에 사이트는 다운이 되어버리고, 워킹홀리데이 카페 회원들은 실시간으로 패닉 상태에 빠진 자신의 심경을 댓글로 업로드 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해외에 나가려고 한다니 동질감이 느껴졌지만 홈페이지 다운 1초 만에 동질감은 경쟁심으로, 경쟁심은 패닉 상태로 바뀌었다. 두 시간의 사투 끝에 겨우 성공했는데, 그 두 시간이 20년처럼 길게만 느껴졌었다.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었기 때문에 심사에는 무사히 통과하였고 비자를 받은 4월 23일, 마음이 급한 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같이 준비하던 언니를 설득해서 3일 뒤 함께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다.


드디어 출국이다!
그 당시에는 내년 복학까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생각에 가족과 떨어지는 것이 아쉽다거나 준비를 더 꼼꼼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빨리빨리 떠났는
데 이 ‘준비 제대로 안됨’ 때문에 숱한 고생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런 고생이 나를 더 성장하게 해줬다. 드디어 출국하는 날, 집 앞에 공항버스가 오는데도 엄마와 이모는 굳이 배웅을 해야겠다며 공항까지 따라왔다. 공항에는 나처럼 장기간 해외로 나가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가족들과 손을 꼭 잡고 차마 그 손을 놓지 못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우리 엄마는 내 엉덩이를 한 번 툭 쳐주고는 “잘해”라고 하며 등을 떠밀어줬다. 나는 너무너무 신이 나고 설레서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엄마를 안심시켜야 한다거나 그런생각은 안중에 없었다. 그냥 “너무 좋으면 안 올지도 몰라” 하고 철없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나중에 이모가 말해줘서 안 일이지만 엄마는 집으로 가는 길에 많이도 우셨다고 한다. 엄마들 마음은 다 똑같은데 나는 우리 엄마는 유달리 강한 줄 알았다. 그리고 그런 우리 엄마를 닮아서 나도 강할 줄 알았다. 1년 못 보는 것뿐인데 하며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해외에 가져가는 트렁크에 그 흔한 가족사진 하나 안 챙겼다. 후에 엄마랑 나는 10개월간 장문의 이메일을 하루가 멀다 하고 주고받으며 서로를 그리워했다. 참, 비행기 티켓은 운이 좋게 직항을 아주 저렴한 값으로 구매했다. 식음을 전폐하고 인터넷으로 발품을 파니 비행기티켓의 신께서 감동하셨는지 직항 반값 티켓을 내려주셨다. 그러나 가장 빠른 직항이라고 해도 남쪽 끝에 자리 잡은 뉴질랜드까지는 약 12시간이 걸렸다. 평소 학교 가는 버스 안 30분조차 지루해서 하품을 몇 번씩 하던 나였는데 12시간의 비행이 하나도 지루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꼭 잘 봐야 하는 전공시험이 12시간 남은 것처럼 그 시간이오는 것이 긴장되고 떨려서 나 혼자 타국에 덩그러니 남는 그 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비행기 안에서 내가 이번 방랑을 떠나게 된 세 가지 목표를 다시 크게 써봤다. 이 비행기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일단 ‘낯선 곳에 가기’까지는 성공시켜줄 테니 걱정이 없다. 그렇다면 ‘낯설게 살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영어를 숨 쉬듯 구사하기’는? ‘내가 번 돈으로 해외여행하기’는? 당시 내가 뉴질랜드에 가져가는 커다란 트렁크 속에는 엄마가 굶어죽지 말라고 챙겨준 김과 카레가루, 옷가지와 신발 그리고 공업수학 책이 한 권 있었다. 실전 영어를 배워야 한다면서 누구나 한 권씩은 가지고 간다는 여행 영어책은 없었다. 통장 잔고는 비행기티켓을 사느라 다 썼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을 환전하여 3,000NZD(뉴질랜드 달러, 당시 환율은 1NZD=800원 정도)를 가지고 있었다. 공업수학 책은 ‘남는 시간’에 전공 공부도 조금 해놓겠다는 나의 의지였으나 결국 10개월간 냄비받침으로 쓰다가 외국인 친구에게 냄비받침으로 쓰라고 기념(?)으로 주고 왔다. 남는 시간이 생길 것 이라고 생각했다니! 혹시 외국으로 어학연수 혹은 여행을 떠나는 친구들이 있다면 이렇게 충고해주고 싶다. 절대로 연수 목적 혹은 여행 목적에 벗어나는 공부를 시도하지 말라고. 더러 “나는 영어 공부 하러 가서 수학도 공부하고 과학도 공부했고 잘만 성공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만큼 치열하게 주목적을 이루지 못 했음에 틀림없다. 여행을 갔으면 일주일 7일 24시간을 이용하여 최대한 많이 듣고 보고 느끼고, 영어 연수를 갔으면 최대한 영어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이다. 남는 시간이 있어 수학도 하고 과학도 할 수 있었다니… 도대체 목적을 벗어나 얼마나 딴 길로 많이 샜다는 이야긴가!

Where am I?
비행기는 한국에 있던 내 동생의 우려와는 달리 추락하지도 않았고 예쁜 승무원 언니들이 주는 음료수랑 밥을 먹으며 사진도 찍고 했더니 무사히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했다. 간단한 입국 심사를 거쳐 게이트를 빠져 나온 언니랑 나는 약간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게이트 앞에는 능숙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 사람, 마중 나온 친구와 반가워하며 껴안는 사람, 가이드의 피켓을 찾고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는 이도 없고 목적지도 없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는 듯하다. 당장 목표2번 ‘영어 숨 쉬듯 말하기’를 연습해 보았다. 노란 머리는 아직 무서우니 일단 나와 좀 비슷하게 생긴 인도인으로추정되는 까만 머리에게 “Where am I?”라고 해봤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날 이상하게 쳐다보고 가버렸다. 얼굴이 화끈했다. ‘나 안 미쳤는데… 그냥 내가 여기 있는 게 너무 신기해서 물어본 거예요!!’라고 마음속으로만 말해주고 숙소로 가기 위해 작은 승합차를 잡아탔다.

낯설게 살기 첫 단계
언니와 내가 첫 숙소로 묵은 곳은 백패커란 시설로 유스호스텔과 거의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뉴질랜드는 워낙 배낭여행자들이 많기 때문에 이 여행자들이 식사와 숙소를 한 번에 해결하는 형태의 백패커가 많다. 물론 다인실인형태가 많고 성별 구분도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우리가 이곳을 첫 숙소로 정한 이유는 낯설게 살기 위해서였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출국하는 많은 사람들(이하 워홀러)은 한국의 유학원에서 연결해주는 숙소를 정하고 출발한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한 번에 픽업해주며 집세며 보증금을 모두 편하게 해결할 수 있다. 나는 ‘낯설게 살기’를 경험하기 위해 한국에서 미리 집 사진을 모두 보고 가격을 맞추고 오는 일을 과감히 생략했다. 준비 없이 왔으니 당연히 고생길이 훤히 열렸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부동산이며 지역 렌트 게시판이며 신문 등에서 정보를 얻으려 발품을 팔았
다. 엉터리 영어로 자꾸 이것저것 물어보니 외국인들의 반응은 마치 공항에서 만났던 인도인 같았다. 키위(뉴질랜드 사람을 지칭하는 말)들이 참 불친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어 실력이 엉터리인데 불가피하게 영어를 사용해야하는 분들은 들어보시라. 나의 영어가 엉터리라 그들이 무시한 것이 아니다. 나의 예절이 문제였던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How can I get here?” 이라며 지도를 들이댔다. 우리나라에서 새파랗게 젊은 놈이 노인에게 지도를 들이대며 “여기 어떻게 가?”라고 하면 그 누가 과연 대답을 해줄까?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다짜고짜 건방진 놈이었던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고 뉴질랜드에 왔으면 그들의 예의를 따라야 했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실례합니다’와 ‘~해 주시겠습니까?’ 정도에 해당하는 ‘Excuse me’와 ‘Please’는필수이다. 이것을 익히기까지 수십 명의 노란머리와 까만 머리와 회색 머리에게 무시를 당했다. 아, 실전 영어가 이런 것이구나….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을 빌리고
더러운 다인실 백패커에서 돈을 아끼려고 세 끼를 모두 맨 식빵을 먹었다. 마음도 불안하기 짝이 없어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러나 마음은 어찌나 꽃밭이던지. 그러다 푸른 언덕 위에 혼자 높게 솟은 아파트 한 채를 보았다. 외관이 긴 깡통 같았는데 파란 하늘의 긴 구름들과 잘 어울렸다. 리셉셔니스트들은 우리가 엉터리 영어로 이야기해도 참 잘 대해주었다. 마침 계약이 가능한 집이 딱 한군데가 있었는데 아파트 맨 꼭대기 층에 한쪽 면이 모두 유리창으로 된 소박하고 하늘이 잘 보이는 집이었다. 가격도 적당했고 우리는 그곳이 너무 마음에 들어 계약을 했다. 아직 일을 찾기에는 영어 실력이 부족한 듯하여 가지고 있던 현금을 몽땅 털어 학원 등록에 투자했다. 처음으로 내 힘으로 빌린 내 집 1호였다.

학원생활
새 집에 대한 환희를 만끽할 새도 없이 학원 첫 등교가 시작되었다. ‘외국인
친구들도 많이 생기고 영어도 원어민처럼 하게 되었고 나는 매일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라고 쓰고 싶지만 첫날 나는 수많은 외국인 친구들 속에서 한마디도 못했다. 내가 영어를 제일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날도 한마디도 못했다. 셋째날 아침에 영어도 못하고 자신감도 없고 학원에 가기 싫어서 아침을 깨작거리고 있으니 갑자기 화가 났다. 그들은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하고 그들 중 몇은 나보다 어리고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나는 한국어는 물론 영어도 몇 마디 정도는 할 줄 알고, 대학교를 2년이나 마치고 온 지식인 계층(대학생이니까 지식인계층에 가깝다고 해두자)인데 왜 거기서 열등감에 가득 차 고독해야 하나 싶었다. 그날 당장 학원에 가서 수다스러워지기를 실행했다. 옆 친구한테 말 걸고, 수업하다 아는 것이 있으면 아는 척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질문을 했다. 내가 가진 얼마 없는 재산 중 ‘용기’를 쓰기로 했다. 학원 생활은 아주 좋아졌고, 외국인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나는 3개월간 곧잘 레벨테스트를 통과하여 단기간에 동기생 중에 가장 빨리 월반하게 되었다.

삼겹살 파티
학원에서 외국인 친구를 사귈 기회가 많았지만 가장 친구를 많이 사귈 수 있었던 것은 ‘파티’였다. 일단 영화 속에 나오는 샴페인 잔을 들고 드레스를 입고 멋진 남자가 우글대는 그런 파티는 없었다. 뉴질랜드에서는 넷이 모여서 고기 굽고 술만 마셔도 파티라고 했는데, 주로 금요일에는 파티가 여러 개 있었기 때문에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이 파티 저 파티를 방문하는 일례 행사를 했다. 나는 주로 파티를 여는 쪽이었는데, 우리 아파트 1층에는 커다란 공동 주방과 홀이 있었다. 그곳에서 삼겹살을 구워서 파티를 열었는데, 외국 친구들이 의외로 삼겹살, 파김치, 마늘 3종 세트를 좋아했다. 다들 이 삼겹살을 먹으러 파티에 왔는데 삼겹살이 내 인간관계에 등불을 밝혀준 샘이다. 영어 교과서에서 보던 지구를 둘러싸고 다양한 인종들이 손에 손잡고 웃던 그림을 기억하는가? 나는 우리 아파트 주방에 그런 모습이 연출되는 것이 너무 좋았다. 존 혹은 톰과 능통하게 영어를 하진 못했지만, 꿈 2번과 연결되는 존과 톰이 나와 삼겹살을 보러 오는 것도 좋았다. 새로운 문화와 배경을 가진 친구들이 삼겹살로 묶이는 순간들이었다. 그 끈들은 삼겹살의 비계만큼이나 두툼해서 우리는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고 서로의 나라를 방문하며 국제적인 우정을 쌓고 있다.

첫 직장
영어학원을 다니며 신나게 놀고 공부한 지 2개월째 드디어 돈이 다 떨어졌
다. 이제는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만 하는 벼랑 끝에 서버렸다. 또 다시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비행기티켓 때도 비행기티켓의 신이 도와줬으니 발품
을 열심히 팔면 아르바이트의 신이 날 도와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는
아주 참담했다. 말 그대로 쌀독의 쌀이 떨어져 가는데 이력서를 넣은 곳에서
연락이 없었다. 한국인과 똑같이 주식이 쌀인 중국인 친구들이 아쉬운 대로 자신의 쌀을 나누어줬는데 한국의 짧고 통통한 쌀이 아니라 길쭉한 쌀이었다. 두 쌀을 섞어 밥을 지어 숟가락으로 푸니 반쯤은 끈끈하게 씹히고 반쯤은 푸석푸석 했다. 안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그 밥이 내 처지 같아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자신이 내가 원래 먹던 찐득한 밥에 외국인 친구가 퍼놓은 길쭉한 쌀밥에서 남의 나라에 녹아드려 애쓰는 내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지원서를 30통쯤 넣었던 것 같은데 결국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자신은 예술고등학교 교사인데 그곳에도 한국인 학생들이 몇 명이 있다고 했다. 공부하고 있는 한국인 학생들 중 방과후 활동으로 수학 심화반에 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맡아 달라는 것이다. 즉, 시간강사직이었다. 아르바이트의 신이 도와줬구나. 틀림없네. 그분이 도와주셨어. 고마워요. 아르바이트의 신님. 그렇게 학원을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가르치는 아이들은 착하고 재미있었다. 집에서 가족 몰래 맛있는 간식이며 로션이나 우비 같은걸 갖다 주는 좋은 아이들이었다. 공부와 아르바이트 그리고 금요일 파티를 여전히 병행하는 나를 일본인 친구들은 슈퍼진이라고 불렀다. 내 영어 이름인 진에 슈퍼(market 아니고 super)를 붙여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고마운 별명이다. 파티에 오면 그들에게 특히 삼겹살을 좀 더 많이 주었다.

본격적으로 워킹!
학원을 무사히 마치고 영어 실력이 많이 향상되었음을 느꼈다. 다들 영어공부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외국에 오는데 그 마음이 쉽게 변질되는 친구들도 아주 많다. 특히 아시아권 학생들은 본국과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와 새로운 문화에 더 쉽게 매료되어 영어 공부를 점점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의지가 박약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럴 때마다 나를 붙잡아주는 것은 늘 모자란 통장 잔고였다. 한마디로 생존에 대한 급박함―학원을 수료하고 영어를 마스터해서 본격적인 일자리를 찾아야 짧은 쌀을 사먹을 수 있다는―이 나를 움직였다.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 것은 물론 학원 선생님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찾아가서 질문과 시시콜콜한 잡담도 하고(이때 느낀 것은 그들도 인간이라 예쁜 학생과 덜 예쁜 학생이 있다는 것이다.) 눈도장도 찍으려고 노력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더니 내가 한국에서 평생 학교를 다니며 한 질문보다도 더 많은 질문을 했다. 조금 무뚝뚝한 마오리 선생님 한 분은 수업 시작 전에 “진, 질문은 수업 끝나고 한 번에 받겠습니다”라고 못을 박고 시작하셨다. 학원이 끝날 때쯤 해서 시간강사직도 계약 기간이 끝났다. 이제 학원도 안 다니니까 학생도 아니고 일도 안 하니까 직장인도 아니다. 백수가 되었다. 두 번째 취직은 의외로 쉽게 성사되었다. 아마 내가 자신감도 많이 붙었고 영어 실력이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졌으며, ‘Excuse Me’를 할 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친구의 소개로 면접을 보게 되었고 잡화상 체인점에 취직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체인점은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 일을 해야 하는 곳이었는데 내가 지원했던 지점이 범죄가 많은 동네라 씩씩한 여자 점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내가 이점이 있었단다.) 물건을 정리하고 손님을 상대하고 계산을 하는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잡화상인 만큼 물건 종류가 한두 개가 아니라 처음에는 고생을 많이 했다. 일이 너무 고되어서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두 번째 직장에는 장점이 세 가지나 있어서 그만두질 못하고 여행가기 직전까지 계속했다. 첫 번째는 큰 회사라서 월급을 투명하게 잘 챙겨준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물건 이름이 너무 많아서 그곳에서 일하다 보면 싫어도 각종잡화의 이름을 저절로 익히게 되는 것이었다. 세 번째 장점이 가장 좋았는데 그 동네가 워낙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는 곳이라서 인도에서부터 스코틀랜드까지 다양한 영어 발음을 들으며 공부하기 좋았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손님 2~3천 명이 몰리는 곳에서 단 둘이 일하느라 너무 힘들었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란 미국식 영어 외에도 다양한 영어를 접할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되었다. 실제로 외국에서 미국 사람을 만날 확률은 미국 발음을 쓰지 않는 비 미국인을 만날 확률보다 훨씬 적으니까.

한국인 특유의 정
외국에 살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외국인 친구들은 물론 한국인 친구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고, 아르바이트의 신, 집세의 신, 길 찾기의 신에게도 도움을 받았다. 나도 한 번쯤은 남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서 봉사활동 등을 찾고 있었는데, 친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번에 자기 친구의 사촌언니가 뉴질랜드로 워홀을 오게 되었는데, 며칠간 함께 있어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다. 나와 비슷한 꿈을 안고 오는 우리 한국인을 돕는데 외국에서의 봉사보다도 더 의미 있게 느껴져 그러자고 했다. 그 언니가 우리 집에서 묵으며 집을 찾고 직장을 구하고 정착을 할 때까지 함께하고 도와주며 의미 있는 시간들을 가졌다. 더러 들었던 말이 ‘외국에 가면 한국인을 더 조심해라’라는 말이 있었다. 일부 몰지각한 한국인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이국의 땅에서 우리 한국인들 특유의 ‘정’을 더 많이 느꼈다. 중요한 것은 그 정을 느끼는데 그치지 않고 나 역시 나누는데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을 조심해라’라고 하는 한국인들을 보면 남을 믿지 못해서 도움을 청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도움도 주지 않는, 스스로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


여행, 아름다운 인연
몇 개월간 일을 하며 돈도 조금 모았고, 동네 지리에도 익숙해질 무렵 다시 세 번째 목표를 실행하기로 했다. ‘내 힘으로 해외여행하기.’ 한국으로 돌아가기 한 달 전 ‘키위 익스프레스’를 신청했다. 이건 배낭여행을 위한 패스로 대중교통이 그리 발달하지 않고 여행지와 여행지 거리가 먼 뉴질랜드에서 버스 정류장과 버스 정류장 사이를 연결해주는 아주 유용한 서비스이다. 패키지여행이 돈도 절약되고 시행착오도 없고 편하지만 열린 경험을 할 기회가 적기에 나는 자유여행을 선택했다. 뉴질랜드는 역시 듣던 대로 아름다웠다. 누구는 이 나라를 ‘지상에 마지막 남은 낙원’이라고 하던데 그 수식어가 아깝지 않았다. 모든 목적지는 아름다웠고, 즐거웠다. 그리고 아름다웠던 여행만큼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만났다.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 안에는 늘 우리 같이 젊음과 열정으로 모험을 시도하는 각국의 친구들이 많았다. 언어는 모두 달랐지만 우리는 모험을 하고 있다는 그 설렘 하나만으로도 서로 잘 뭉쳤다. 서로 오늘 밤 묵을 숙소 중 괜찮은 곳을 알려주고,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유용한 정보를 나누며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바다 같은 호수 타우포에서는 함께 수영을 했고, 자전거를 타며 얼굴을 까맣게 태웠다. 로토루아에서는 유황 냄새를 맡으며 유명한 닭요리를 먹고, 온천을 함께했다. 배이 오브 아일랜드에서는 탁 펼쳐진 바다를 모두 함께 손을 잡고 보았다. 앞으로 펼쳐진 우리들의 미래 같다는 누군가의 말에 우리 모두 괜히 시큰했다. 밤에는 백패커 앞마당에서 바비큐를 하며 10년 지기 친구만큼 가깝게 어울렸고, 낮에는 또 새로운 여행지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학원 친구들이 삼겹살로 맺어진 인연이라면 여행에서 만난 친구들은 모험이라는 키워드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한 달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는 이제 누가 봐도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 같았다. 가무잡잡한 피부하며 멋대로 자란 머리카락, 슬리퍼에 반바지, 불어난 몸 때문에 커진 덩치, 배낭을 훌쩍 둘러맨 모습이 자연과 어울려 자유롭게 사오는 마오리와 똑같았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오면 딱 비행기 날짜와 하루 차이 났지만, 집에 너무 정들었기 때문에 여행 다니고 돌아오는 날까지 계약을 연장해놓았다. 우리는 집에서 하루 자고 비행기를 타러 새벽에 떠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17층 우리 집에서 바라보는 마지막 노을 속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듯했다. 나의 세 가지 목표는 잘 이루었는가? 낯선 곳에서 충분히 낯설게, 여행지에서 충분히 즐겁게 잘 즐기고 치열하게 목표를 이루었다. 다만 존과 톰을 만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숨 쉬는 것만큼 영어를 잘하진 못한다. 조금 더 치열하게 살아볼 걸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처음 백패커에서 우왕좌왕 할 때를 생각하니 그런대로 잘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질랜드 행 비행기에서 쓴 목록을 벽에 붙여놨었는데, 1번과 3번에 줄을 긋고 떼어서 잘 챙겼다.

그 후
한국에 돌아온 나는 한 달 정도 뉴질랜드에 대한 상사병을 앓았다. 그러나 아직 지우지 못한 42가지의 목록―특히 2번―을 이루기 위해 다시 고군분투하고 있다. 다녀오기 전보다 더 넓은 가슴을 갖게 되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그 전에는 화학공학을 전공하여 공학자가 되려고 했는데, 이제는 글로벌 매니저가 되어 전 세계를 누비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외국인 친구들과는 아직도 빈번히 교류하며 그중 특히 형제처럼 잘 지내던 프랑스 친구 한 명과 일본 친구 두 명이 한국에 다녀갔고, 나도 일본을 한 번 방문했다. 영어 실력도 향상되었다. 내가 그곳에서 얻어온 것은 외국인 친구나 영어 실력뿐이 아니다. 이력서에 넣을 한 줄도 아니고 단순한 자신감 회복도 아니다. 나는 젊음과 열정이 나의 큰 재산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둘을 팔아서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전히 나의 재산을 열 몇 가지뿐이지만 나머지를 사기에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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