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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다시날아오르다, fly again!
제목 [호주]다시날아오르다, fly again! 등록일 2011-06-14 06:50 조회 11431
작성자 육은지

 

2010년 3월 24일, 처음으로 시드니 땅을 밟았던 그날을 기억한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으며 나는 분명 높은 하늘만큼이나 들떠 있었다. 22년 인생, 단 한번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떠난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홀로 떠난 호주로의 워킹홀리데이는 분명 큰 도전이고 모험이었으리라. 호주에 온 지 이제 다섯 달이 지난 지금, 나는 매일 밤 신께 고백한다. 오늘도 유난히 눈부시고 파란 하늘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드린다고.

발돋움
2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안 되서 나는 캠프힐camphill이라는 ‘국제장
애우생활공동체’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캠프힐 커뮤니티는 세계 각국
에서 온 봉사자들이 그곳의 장애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전반적인 삶을 보조하는 크고 작은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1학년 때부터 해외경험을 하고 싶어서 휴학을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캠프힐은 해외경험뿐 아니라 전공과 관련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때부터 영국에 있는 캠프힐을 중심으로 메일 접촉을 시작했고 비행기 티켓 값이라도 벌어보고자 두 개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게다가 학점도 유지해야 했기에 결국 시험 기간의 내 일상은 다음과 같았다. 오전 11시부터 레스토랑에서 3시간 일을 하고 하루 종일 수업을 듣고 저녁 6시부터는 다시 카페에서 일을 한 후, 11시 반쯤 가게 문을 닫으면 학교 도서관으로 가서 밤새 공부를 했다. 그리고는 아침 6시에 집으로 가서 3시간 자고 일어나서 다시 레스토랑으로 가는 이런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바쁘게 살았음에도 영국에 갈 생각에 지칠 줄 몰랐던 것 같다. 그러나 5개월 동안 거절메일 또는 한참 뒤에 와달라는 내용의 메일만 받게되자, 결국 꿩 대신 닭으로 오게 된 것이 호주 워킹홀리데이였다. 그래서 정작 워킹홀리데이에 대한 준비는 충분히 하지 못한 채 비행기에 올랐다. 분명 하고 싶었던 것은 해외봉사였고, 가고 싶었던 곳은 영국이었는데, 호주에 온 지 반 년도 채 안 된 지금, 경험한 것보다 경험해야 할 게 훨씬 더 많고 여행한 것보다 여행해야 할 곳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체험수기’라는 것을 쓰게 된 것은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한 것에 결코 후회가 없음을, 이곳에서 하루하루 너무나도 소중한 경험들을 하고 있음을 내 스스로가 이미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오페어 호주에서의 첫 한 달은 시드니에서 보냈다. 한 인터넷 카페에서 운영하는 시드니 2주 적응하기’라는 프로그램을 신청하여 그곳 게스트하우스에서 생활 했는데 그 프로그램은 워킹홀리데이를 오는 학생들이 처음 2주 동안 같이 살면서, 서로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고 먼저 온 자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하는 그런 시스템이다. 워킹홀리데이! 그 이름처럼 홀리데이를 즐기기 위해서는 워킹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는 내 전공이 특수교육이기 때문에 전공을 살려서 차일드 캐어child care쪽 일을 하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을 뿐, 호주에서 어떤 일을 어떻게 구해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게스트하우스에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오페어Au-pair에대해 듣게 되었고 좀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다가 그것의 매력에 빠져버려 시드니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날부터 본격적으로 오페어를 구하기 시작했다. 흔히 오페어를 가정부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오페어는 가정부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며 오페어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An au-pair is young person from foreign country who lives with a family in order to learn the language and who helps to look after children. 즉, 외국에서 온 젊은 사람이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호스트패밀리와 함께 살며 아이를 돌봐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호스트패밀리가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며 많지는 않지만 주급을 받는다. 내가 오페어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무료로 홈스테이를 하면서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아이와 매일 놀아줄 수 있고 자연스럽게 호주 현지 가정의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큰 장점 때문이었다. 여느 직업처럼 주마다 임금을 받는데, 거기에 매일 영어회화 연습의 기회까지 주어지니 일석이조에 꿩 먹고 알 먹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그것이 바로 오페어였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오페어를 구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오페어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오페어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 《호주 오페어로 오렴》이라는 책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오페어를 구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에이전시에 회원으로 등록해 가족을 찾는 방법과 개인이 직접 구하는 방법이 그것인데 에이전시에 회원으로 등록하게 될 경우 500불이 넘는 수수료를 내야 한다. 한국에서 오페어를 목적으로 호주를 오려고 준비하는 경우, 에이전시에 1,500불의 수수료를 내야 하며 대신 한국에서 준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열흘 안에 호스트패밀리를 찾아주겠다는 조건이 붙는다. 물론 에이전시에 회원으로 등록하여 호스트 패밀리를 찾는 것이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스스로 오페어를 구해보는 과정 역시 경험이 될 것이란 생각에 무작정 혼자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일단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오페어 웹사이트를 3개 정도 선정하여나의 프로필을 올렸다. 혼자서 오페어를 알아보는 경우에는 웹사이트를 통해 가족을 찾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기 때문에 프로필을 어떻게 작성하느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오페어를 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본인이 아이들을 참 좋아한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점이기도 한 반면, 누구나 그런 내용을 넣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가족들의 관심을 끌기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나의 경우 전공이 특수교육이기 때문에 2년 동안 정기적으로 장애아동을 돌보았던 경험과 교회에 서 3년 동안 교사를 했던 것, 아르바이트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것, 나이 차이가 6살, 10살 나는 두 명의 동생이 있어서 어렸을 때부터 그들을 돌보았다는 것 등을 통해서 아이들에 대한 경험이 충분함을 나타내려 노력했고 오페어가 아이를 돌보는 일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가정들이 간단한 집안일을 요구하기 때문에 나는 여러 번의 아르바이트 경험으로 간단한 집안일을 잘 소화할 수 있다는 내용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족들이 ‘서류’를 꽤 중요시하는 편이기 때문에 추천서나 재학증명서, 이력서와 같은 필요한 문서들을 미리 준비해놓는 것이 좋다. 가족들과 접촉을 할 때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것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 거주 도시, 가족의 국적, 아이들의 수와 연령대, 오페어가 머물게 될 방, 주당 근무시간과 구체적인 시간표, 주급, 운전을 해야 하는지의 여부, 종교, 애완동물 유무 등이 그것들이다. 중요하지 않은 사항이 단 한 개도 없으니 꼼꼼히 체크해야 한다. 나는 웹사이트에 있는 내 프로필을 보고 연락을 주었던 열다섯 가정과 3주 동안 메일을 주고받다가 어느 날 한국인 오페어를 구하는 퍼스에 있는 가족으로부터 관심이 있다는 메일을 받았고 수 차례의 전화면접 후에, 그렇게 나는 오페어가 되었다.

시드니, 안녕
시드니에 있는 동안 일을 구하는 것에만 매진했을 리 없다. 한 달 동안 가보지 않은 곳이라곤 카지노밖에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사진으로만 보던 오페라하우스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그 감격도, 우연히 바람쐬러 갔던 달링하버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바람에 다 같이 신나서 불꽃축제를 즐겼던 일도, 호주에 왔으니 캥거루부터 봐야 한다며 페리를 타고 동물원에 갔던 일도, 시드니 대학교를 탐방하면서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입이 떡 벌어졌던 일도, 맨리비치에 가서 실컷 물놀이하고는 그 앞 편의점에서 3불을 주고 사먹었던 꿀맛 같던 신라면도, 블루마운틴에서 산이 정말 파란색이라며 신기해했던 일도 여전히 나를 웃음 짓게 하는 소중한 기억들로 남아있다. 그때는 내가 호주라는 새롭고 낯선 땅에 있음을 그리도 내 피부로 내 살갗으로 느끼고 싶었나 보다. 날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웠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늘 일을 구하는 것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그 탓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꽤 힘들어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오히려 시드니에서의 생활이 자꾸만 그리워지려 하는 것은 내게 또 하나의 가족을 선물해준 곳이기도 하고, 현재 힘들게 일하고 있는 자만이 갈망할 수 있는 휴식이란 것을 그때는 당연하다는 듯 누리고 있었던 까닭이다.

첫번째 호스트패밀리
나의 첫 번째 호스트패밀리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호스트대디는 영국인이고 전직교수이다. 은퇴를 하셔서 보통 집에 있기 때문에 중간 중간 나에게 휴식시간을 주기도 했으며 일이 끝나고 나면 하루에 한 시간씩 영어 공부를 도와 주셨다. 호스트맘은 한국인이고 회계사인데 풀타임으로 일을 해서 아침 7시 이전에 출근하고 저녁 6시나 되어야 집에 돌아오셨다. 그리고 내가 세 달 동안 돌보았던 프레디Freddie는 3살짜리 남자아이였다. 아이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한국말은 ‘이모’였다. 그는 나를 이모라고 불렀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프레디는 보통의 세 살배기 아이들과는 조금 달랐으며 프레디뿐 아니라 우리 집 자체가 결코 평범한 가정은 아니었다. 우리 동네는 캥거루가 뛰어노는 친환경적인 곳이었다. 대신 교통이 불편해서 시장에 가려면 차를 타고 10분은 나가야 했다. 덕분에 우리 동네에는 나와 호스트맘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의 한국인도 없었다. 그 점이 내가 호주의 전형적인 가정을 체험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이 가정을 나의 첫 번째 호스트패밀리로 선택했던 이유 중 하나는 호스트맘이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오페어를 처음 하는 것인데다가 아직 영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지 못하는 내게는 한국인 호스트맘이 있는 것이 가족들과 중요한 것들을 상의할 때 나 또는 갈등이 생겼을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호스트맘 덕분에 나는 매일매일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김치는 말할 것도 없고 깻잎이나 무말랭이와 같은 지극히 한국적인 음식까지도 말이다. 본격적인 오페어 생활이 시작되었다. 월요일은 아이와 플레이그룹에 가는날이다. 우리나라 유치원과 다른 점은 9시부터 11시 반까지 짧은 시간 동안 수업이 이루어지며 엄마들이 함께 한다는 점이다. 실내에서는 아이가 엄마와 함께 미술활동과 만들기, 블록 쌓기 등을 할 수 있도록 되어있고 실외에서는 모래사장과 그네, 미끄럼틀 등 각종 놀이시설들이 구비되어 있다. 3살짜리 남자아이인지라 나는 한시도 프레디에게 눈을 뗄 수 없긴 했지만 매주 플레이그룹에 갔던 덕분에 많은 아이 엄마들과 친분을 다질 수 있었다. 실제로 내가 퍼스를 떠나기 전에 아이 엄마들이 카드와 선물을 준비해주어서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또한 종종 농장이나 광산 같은 곳으로 현장학습을 가곤 했는데 나에게도 역시 좋은 경험이었다. 화요일에는 킨디짐에 가는 날이다. 킨디짐은 말 그대로 아이들 체육관인데, 한 번 갈 때 마다 5불씩 냈다. 킨디짐에서 2시간씩 놀고 오면 아이는 꼭 낮잠을 자곤 했다. 수요일은 마더스 미팅이 있는 날이다. 마더스 미팅은 수요일에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모닝 티와 과일들을 준비하여 같은 동네에 사는 엄마들과 아이들이 함께 모여 친목을 다지는 모임이다. 우리 집에서 마더스 미팅이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분주했던 기억이 난다. 목요일은 내가 체육관에 가는 날이다. 매주 목요일 오전에 파워바와 요가 수업을 들었는데 그동안 아이는 체육관 안에 있는 크레쉬에 있었다. 크레쉬는 엄마가 운동을 하는 동안 아이를 봐주는 놀이방 같은 곳이다. 금요일은 아이의 스케줄이 없는 날이어서 호스트대디는 집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 내가 지루할 거라며 금요일 마다 여기저기 데리고 가주셨다. 아이의 모든 스케줄은 점심쯤에 다 끝났기 때문에 오후에는 집에서 아이를 보는 일이 많았다. 옆집에 사는 웨슬리(8세)와 에바(4세)가 매일 놀러왔고 이웃과의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나는 늘 많은 아이들과 함께 했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오페어였지만 역시나 아이를 보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한국에 있을 때는 새벽 1시나 되어야 잠자리에 들던 내가 오페어를 했던 세 달 동안은 꼭 10시 반이면 침대에 눕곤 했다.

신선한 호주 문화
아이 엄마들과 친분이 생기고 이웃집 사람들과 친해지기 시작하면서 호주인 가정을 가볼 기회가 자연스레 많이 생기게 되었다. 또 외국인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점심, 저녁 초대를 자주 받게 되어 더욱 그랬다. 그러던 중 내게는 신선하게 다가왔던 호주 가정의 문화들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어느 집을 가든 꼭 “마실 것 좀 줄까?”라고 묻는데 종류는 대개 차와 커피로 나뉜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했던 것은 커피를 마시겠다고 대답했을 경우 꼭 우유와 설탕의 첨가 여부를 더불어 묻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물론 기호에 따라 넣기도 하겠지만 보통 가정집에서는 “우유는 얼마나 넣어줄까?”와 같은 질문은 보통 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런 질문을 받는 것이 생소해서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내 익숙해져서 그 다음부터는 내가 먼저 “No milk, one sugar! thank you”라고 말하곤 했다. 둘째, 아이가 부모를 부르면 부모는 “Yes, darling”이라고 대답한다. 처음엔 darling이라는 말을 부부 사이나 연인 사이에서만 쓰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들을 때마다 어색했는데 여기 사람들은 자기 자식뿐 아니라 동네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부른다. 아 얼마나 달콤한가. 셋째, 프레디 친구들의 생일파티를 여러 번 참석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생일축하노래를 부른 후에는 꼭 “Hip hip hooray”를 3번 외친다. 보통은 생
일 맞은 아이의 부모님이 “Hip hip”이라고 선창하면 초대된 사람들이 다함
께 “Hooray”를 외친다. 나중에 호스트대디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더니
“Nothing”이라고 대답하셨다. 내 생각이지만 일종의 환호나 응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넷째, 이것은 옆집 웨슬리의 생일파티 때 알게 된 문화인데, 생일선물을 초대된 모든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풀어본다. 이것은 원래 유럽의 문화라고 한다. 근데 나는 이런 게 익숙하지 않아서 웨슬리가 내가 준 선물을 뜯어보고 내가 쓴 카드를 읽을 때 무척 민망했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은 호주의 가정들은 대부분이 집 정원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머물렀던 곳이 시티가 아니었기에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갔던 모든 호주 가정들은 트램펄린, 그네, 모래사장, 커비하우스를 모두 갖추고 있었으며 특히 커비하우스 같은 경우는 아빠들이 직접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준다. 아이들이 맨발로 잔디밭을 뛰어다니며 노는 모습은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엄마들의 성화에 학원을 서너 개씩 다니며 경쟁을 준비하는 우리나라의 어린 아이들과는 무언가 달라도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내겐 제법 새롭고 흥미로웠던 호주 문화들은 오페어를 했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 전형적인 호주 가정을 많이 체험할 수 있었던 점은 지금 생각해도 내겐 꽤나 큰 행운이었다.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 집은 보통 평범한 가정과는 달랐다. 호스트부부는 이미 각방을 쓰며 이혼을 준비하는 중이었고 프레디는 엄마와의 유착관계 문제로 정기적으로 상담을 받는 아이였다. 겉으로 보기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세 살배기 남자아이지만, 감정기복이 매우 심하고 종종 폭력적인 성향을 띠었다. 또 잠시라도 시야에서 아빠가 벗어나면 눈빛부터 변하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였다. 이 모든 환경은 오페어인 나에게도 큰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처음에는 내가 아이에게 정을 주는 만큼 아이가 나에게 정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힘들었는데 어느 날 호스트대디가 나에게 상담내용을 이야기해준 이후로는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예전보다 더 품어주고 사랑해주려고 노력했다. 상담사가 얘기한 내용에 의하면 프레디는 엄마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자신과 함께 있지 않고 풀타임으로 일을 하며 대신 내가 자신과 놀아주고 있다는 상황에 매우 화가 나 있다고 했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에 의하면 아기 때부터 부모의 관계나 가정의 환경과 분위기 또한 은연중에 아이의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점점 작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아이의 나쁜 행동들이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아빠 없이도 나와 3시간 이상씩 잘 놀기도 했고―그것은 기적이었다― 친구를 때리거나 울렸을 때 사과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내가 쉬는 날에도 틈만 나면 내 방에 와서 ‘이모’를 계속 불러대며 놀아달라고 조르곤 했다. 그러나 원래부터 호스트부부는 부부관계와 무관하게 나에게는 매우 신경을 써주셨다. 프레디 때문에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에 늘 미안한 마음을 나타내셨고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으셨다. 앞서 언급했듯이 호스트대디는 저녁마다 나의 영어 공부를 한 시간씩 도와주셨고 시장에 가면 내가 먹고 싶은 것들을 사주셨다. 호스트맘은 요리를 좋아하셔서 맛있는 음식들을 많이 만들어주셨다. 내 생일에는 미역국도 끓여주셨고 나 모르게 몰래 이웃들을 초대해서 깜짝 생일파티도 열어주었다. 그렇게 오페어 생활에 더욱 재미를 붙여가기 시작하면서 나는 회원수가 만명이 넘는 호주워킹홀리데이 관련 커뮤니티에 나의 오페어 이야기를 연재하게 되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셨다. 그렇지만 오페어의 장점만 보고 무작정 하고 싶다고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고 진짜로 오페어를 경험해보고는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왕관을 쓰려는 자는 무게를 견뎌야 한다’라는 제목으로 오페어는 절대 장점만 보고 할 일은 아니며 나름대로의 어려움과 단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내용으로 한 편의 글을 올렸다. 더불어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분명히 밝혔다. 나는 하루하루 매우 소중한 경험들을 하고 있고 그래서 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나의 오페어 생활을 부러워하지만 사실은 나도 내 왕관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고. 스스로 이 왕관을 쓰길 원했기에!

백패커에서의 13일
다사다난했던 세 달간의 오페어 생활을 마치고 나는 퍼스 여행을 위해 백패커로 숙소를 옮겼다. 백패커는 여행자숙소인데 장기 투숙하는 사람들도 있
지만 보통은 여행자들이 단기간 머물기 위해 찾는다. 그곳에서의 13일은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가 친했던 친구들은 한국 친구들 외에도 홍콩, 타이완, 칠레, 일본, 이스토냐, 독일, 영국 친구들이었는데 특히 식사시간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각자 자기 나라의 요리를 준비해서 다 같이 모여 함께 먹는데 덕분에 다른 나라의 다양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다. 한번은 킹스파크로 다 같이 퍼스 야경을 보러 갔었다. 저녁을 먹고 출발했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새벽 1시가 되어서야 백패커로 돌아왔었다. 백패커에 있게 되면 다른 나라의 문화, 음식, 여행 중에 생긴 에피소드 등 다양한 주제로 얘기하는데 당연히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에 회화 연습에도 큰 도움이 되었고 영국 친구는 이따금씩 우리의 어눌한 발음을 고쳐주기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깐 머무르고 떠난다는 백패커의 특징 때문에 중간중간 친구들을 떠나보내야 했고 나 역시 그곳을 떠날 때 무척 아쉬움이 컸지만 여전히 페이스북이나 전화로 그때 만난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퍼스 여행
오페어를 할 때도 주말은 쉬었기 때문에 퍼스 시티나 가까운 명소들은 다갔었는데 장거리 여행은 하지 못했기 때문에 퍼스를 떠나기 전, 퍼스 시티 북
쪽으로의 여행을 계획했고 마침 내가 오페어를 마치는 날짜에 맞추어 시드니에 있던 친구가 퍼스에 와서 우리는 여행사에 4일 투어를 예약했다. 운전이 가능하다면 차를 렌트하여 여행을 떠나는 방법도있지만, 여행사를 통한 투어의 좋은 점은 가이드가 동행한다는 점과 모든 식사와 숙소 그리고 여러 활동비용 등이 여행비용에 모두 포함되기 때문에 개인이 따로 준비할 것이 없고 더불어 세계 각국에서 온 많은 여행자들과 함께 여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4일 동안 함께 여행했던 21명 모두 단 한 사람의
모난 사람도 없이, 단 한명의 스모커도 없이(담배 피는 사람이 있으면 중간 중간 차를 세워야 한다) 너무나 마음이 잘 맞아서 더욱 행복하고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된 것 같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금세 정이 들어버려 실제로 여행 후에 따로 만나 식사를 하기도 했으며 함께 여행했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여전히 연락을 유지하고 있다.아이의 마음을 읽는 마법사가 되기 위한 경험 중 나는 지금 멜버른에서 두 번째 가족을 찾고 있는 중이다. 가족을 찾으면서 마냥 놀 수가 없어 쇼핑센터 안에 있는 액세서리 가게에서 파트타임으로 세일즈를 하다가 지금은 외국 손님이 90%인 한국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다. 영어로 손님을 상대하며 물건을 팔았던 일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지만 이전에 해보지 못했던 경험이어서 이것 또한 내겐 새롭고 흥미롭다. 그렇지만 사실은 얼른 두 번째 가족을 찾아서 또 한 번의 오페어 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다양한 일들을 해보게 되면서 느낀 것이지만 나는 오페어를 했을 때 가장 설레고 행복했던 것 같다. 오페어를 한 번 더하고 11월 말쯤에는 케언즈로 가서 호주자연환경봉사단CVA를 한 달 동안 한 후 호주와 뉴질랜드 여행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해외에서 홀로 생활하는 것이 결코 만만치는 않다. 때로는 한없이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울 때도 있고 한국에서는 하지 않았던 아니 할 수 없었던 집 걱정, 밥 걱정, 돈 걱정도 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지금 힘든 것들도 나중에 한국에서는 “그땐 그랬었지” 하며 웃으며 떠올릴 추억이 될 것이란 것을. 그리고 이 경험으로 말미암아 더 높이 날아오르리란 것을. 젊은 이는 분명 아름답고 존귀하다. Fly again!

“은지야, 너는 꿈이 뭐야?”
“내 꿈? 아이의 마음을 읽는 특수교사”
“뭐야, 마음을 읽어? 완전 마법사네?”
“응, 나는 지금 마법사가 되기 위한 경험들을 하는 중이야. 이곳 호주에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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