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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아직끝나지 않은 인생 여행
제목 [호주]아직끝나지 않은 인생 여행 등록일 2011-06-20 06:31 조회 9748
작성자 진승훈

 

이날 역시 그랬다. 지도 책 하나 펼쳐놓고 홀로 루트를 짜던 중, 지도상에 표시가 애매한 땅 끝에 도달하고 싶었다. 왠지 그 포인트를 찍어야만 할 것 같
았다. 그렇게 기세 좋게 출발한 미지의 탐험은 끝을 보지 못한 채로 끝이 났다. 지도에서도 현재 위치를 찾을 수 없었고 길에는 표지판 없이 계속해서 갈림길이 나왔다. 그냥 감에 맡기고 전진하다 보니 해가 저물고 어둠이 찾아왔다. 한편 길이 계속 이상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결국 발견한 하나의 표지판 ‘4WD ONLY, Extremely Dangerous.’ 차에 내려 길을 살펴보니 힘이 달리는 내 차로는 전진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아쉬웠지만 현명한 것이 어느 쪽인지의 판단력은 잃지 않았기에 발길을 돌렸다. 그 찰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난 지금 딱히 돌아갈 곳이 없지 않은가?’ 이런 오지에 막연히 홀로 있는 것… 두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했다. 다시 돌아가려 힘을 빼지 않아도 오늘 멈춘 이곳이 오늘 나의 보금자리가 되는 것… 표현하기 힘들지만 그 전까지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고 기대 못한 좋은 느낌이었다. 그순간의 느낌이 삶 전체를 거시적으로 보게 해주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렇게 무모하게 도전할 때도 생기고 또 후퇴할 일이 생길 수 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일이 생길 수 있다. 그것이 과연 그렇게 두려운 일인가? 아니다. 지금처럼 예상치 못한 편안함과 즐거움을 가져다 줄지도 모를 일이다….’ 이 한밤중의 해프닝은 나에게 어떤 일이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대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용기를 가져다 주었다. 또한 만약 돌아갈 곳이 없어 앞으로 전진을 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새로운 것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지 않은가? 지도상에서도 지금 어디인지 모르던 그곳, 비탈길 한쪽에 차를 세우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하수가 깔려 있었다. 사람에게 은하수를 볼 수 있는 기회가 평생에 몇 번이나 있을까? 난 참 행운아다. 수많은 밤을 은하수와 함께했으니… 내 시야 안에서 ‘행복’이라는 무형의 것을 손으로 딸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라면 그 느낌이 좀 전해질까? 그렇게 밤공기를 마시고 생각에 잠겼던 그자리가 그날 나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약간 쌀쌀했지만 여정이 길었는지 잠은 일찍 들었다. 새벽 5시쯤 됐을 무렵 눈을 떴고 차 안에서 나와 기지개를 폈다. 아래 사진은 그 순간 만났던 자연과의 조우다. 지평선 위로 깔린 안개와 그위로 붉고 노랗고 파란 하늘이 만들어 내는 하모니, 약간은 쓸쓸해 보이는 나무와 달… 이 경치는 아직도 내 사진과 기억 안에 알싸한 순간의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다. 그때의 그 순간이 그리운 건 적막 속에서 자연과 나눈 이야기들이 이 도시에 기계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보다 오히려 더사람냄새가 나서가 아닐까?

내 고향, 퍼스
퍼스, 호주라는 나라의 내 고향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만으로 그 도시에 매력을 느낀 나는 그곳을 첫 목적지로 정했다. 그곳엔 아름다운 자연과 너무도 친절한 사람들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분위기, 그리고 없었던 여유마저 만들어 주는 라이프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마치 그전 까지 흩어져 지냈던 내 몸과 영혼이 이곳에서 다시 하나로 만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퍼스에 도착하기 전 나는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저녁에는 대학에서 수업을 듣는 생활을 근 2년간 해오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내 몸은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었지만 내 영혼은 어딘가 방황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 퍼스는 그 둘을 다시 만나게 해준 장소였다.

영어, 그리고 문화의 습득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사전에 한국에서 영어 학교와 홈스테이를 등록했다. 퍼스에 도착해 등록한 학교가 시작되기 전까지 약 4일간의 여유가 있어서 홀로 도시 탐험을 감행했다. 대중교통의 이용부터 단순히 무언가를 사먹는 일까지 너무나 버거웠던 그때를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나곤 한다. 예상보다 만만치 않았던 첫 나들이를 뒤로 하고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서호주를 통틀어 가장 크다는 대학교의 사설 영어학교로, 신중히 선택한 그곳은 예상보다 같은 반에 한국인이 너무 많아 영어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 등록한 5주 이후 학교를 그만 두었다. 물론 학교를 다니면 조금 더 편하고 안정적으로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있었겠지만 직접 경험해본 영어 학교는 비싼 학비만큼의 매력이 없었다. 나는 5주의 학교생활 후 일상생활의 모든 터전을 내 공부의 장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만약 영어 학교의 수업 내용이 은행이나 금융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교실에서 실력이 비슷한 학생들끼리 있는 것보다 실제로 은행으로 가서 부딪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만약 학교에서 역사에 대해 공부한다면 나는 실제로 박물관을 찾아가 가이드 투어에 참여했다. 그리고 사전 하나 들고 박물관에 넘쳐나는 설명들을 해석해 나갔다. 그것보다 더 좋은 공부가 어디 있겠는가? 그밖에도 나는 영어 학교에 낼 수업료로 스윙 수업에 참여해보기도 했고 축제에 가거나 내가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활동에 투자했다. 그곳은 영어권 국가였고 학교 밖 모든 곳이 영어를 습득할 수 있는 배움의 장이었다. 약간의 뻔뻔함이 필수이지만 현지인들은 너무나도 친절했기에 미숙한 내 영어를 들어주려고 노력했고 날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같은 내용을 반복해 설명해주기도 했다.

새로운 보금자리
직접 부딪치며 언어와 문화를 습득해나가던 나는 이번에는 부동산을 통해 내가 맘에 드는 집을 빌려보기로 결정했다. 부동산 광고들을 보러 다니다 호텔
장기 렌탈룸이 저렴한 가격에 나온 것을 발견했다. 직접 가서 보니 제시한 가
격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곳이었다. 사전을 옆에 끼고도 해석이 어려웠던 부동산 서류 작성을 마치고 부동산에 제출했다. 그런데 그것이 경매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부동산이 제시한 가격 말고 본인이 가격을 기입할 수 있던 것이었는데 나는 부동산 제시 가격을 그대로 적어 넣었고 많은 팀들이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는 것을 제출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허무하긴 했지만 뜻하지 않게 참여하게 된 집 경매는 학교에선 경험할 수 없는 재미를 선사했고 이후 부동산의 집들을 돌아보는 것이 한층 더 즐거웠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집은 퍼스하면 빼놓을 수 없는 명소 킹스파크 바로 앞에 위치한 곳으로 많은 나무들 덕분에 너무나 상쾌한 공기를 가지고 있었고 집 앞에는 퍼스 시에서 운영하는 무료 버스까지 지나다녀 편리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지금 다시 해도 쉽지 않을 부동산 서류 작성을 마치고 새로운 곳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호주건국기념일, 그리고 이웃
새로운 집은 서울에서 점점 잃어갔던 이웃의 개념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집은 4층 높이의 조그만 아파트였고 건물들이 ‘ㄱ’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어 베란다에서 다른 집의 베란다를 볼 수 있는 구조였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집안에 들어서려는데 누군가 불러 세웠다. 이웃집에 살던 마커스였다. 새로 이
사 온 이웃이 궁금했으리라. 그는 먼저 인사를 건네며 며칠 뒤에 있을 호주건
국기념일Australian Day에 이 아파트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음식을준비해 옥상 파티를 할 거라며 나를 초대했다. 그렇게 호주건국기념일이 찾아왔고 나는 못하는 요리 실력으로 불고기와 제육볶음을 만들어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미 인사를 나눈 마커스를 비롯해 바로 옆집 선남선녀 커플 존과 클레어, 파일럿인 존, HP에서 회계사로 근무하던 자넷, 석유가스 회사 엔지니어 리로이 등 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웃들과 인사를 하게 되었다. 이들은 마치 가족처럼 일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애정과 편안함이 넘쳐나는 그런 곳이었다. 그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냥 베란다에서 베란다로 이름 한 번 외치면 되는 그런 것이었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아도,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들선들한 바람이 불던 어느 저녁, 우리는 자넷의 베란다에 둘러앉아 맥주 한 병씩을 마시며 일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오가던 중 아파트 아래에서 어떤 사람이 계속 서성이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호기심 많은 마커스는 무슨 일인지 물어봐야겠다며 내려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온 마커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사람은 오갈 데 없는 부랑자였고 마커스에게 하룻밤 묵어갈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생면부지의 부랑자에게 50달러를 선뜻 내주며 방을 구해서 하룻밤 묵어가라고 했단다. 어떻게 보면 그냥 신경 안 써도 될 일이었다. 4층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길까지 내려가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 않고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나가는 부랑자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었다. 순간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그 순간 솔직히 느낀 게 많다고 그들에게 얘기했고 그중 몇몇은 유니세프에 가입해 매달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는 기부금을 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리로이는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자신이 지원해주고 있는 아이와 직접 편지도 주고받으며 어떻게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말하며 받았던 편지와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기부라는 것은 아주 먼 나라 얘기라고 인식했었던 그 당시 나에게 이 모든 것은 신선한 파장으로 다가왔다. 나는 매일 아침 서울 지하철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부대끼고 무표정이거나 찡그리는 사람들을 지나쳐오며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사람을 사람이 아닌 사물로 인식해오고 있는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지고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는 이웃들을 보며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 이 이웃들 덕분에 깨닫고 배운 것도 많았고 즐긴 것도 많았다. 파일럿인 존을 따라서 경비행기에 몸을 싣고 퍼스 상공을 누벼보기도 했고 말레이시아 출신인 자넷의 초대로 중국 전통 설날을 그들의 가족들과 보내기도 했다. 리로이를 따라 보트를 타고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바다낚시를 해보기도 했다. 난생 처음 배 멀미의 무서움을 맛보기도 했고 낚싯대만 담그면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올라오는 것에 입을 다물지 못하기도 했었다.

내 발이 되어줄 녀석을 만나다
퍼스에 있는 동안 너무나 재미있고 행복했지만 한정된 시간 안에 그 넓은 나라에서 한 곳에만 있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본격적인 여행을 위
해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구속에서 자유롭고 싶어 중고차를 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차를 구하는 것 또한 집을 구하는 것처럼 어려웠지만 이것 역시 산 공부가 되어주었다. 차를 팔고 있던 많은 여행자들을 만나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그 지역 주민들을 만나보기도 하고 약 2주 동안 신문, 인터넷, 여기저기 붙어 있는 게시판의 공고를 보며 앞으로 나의 발이 되어줄 차를 신중하게 고르게 되었다. 퍼스에 있는 전문 중고차 숍들을 많이 둘러보았고 적당한 가격의 바다를 닮은 하늘색 11인승 밴에 마음을 빼앗겼다. 혼자이지만 큰 밴을 선택한 것은 매우 잘한 결정이었다. 나는 그 안에 의자를 눕혀 매트리스를 넣고 텐트를 비롯해 각종 취사도구와 캠핑 장비를 갖췄다. 게다가 해변이 많은 호주 여행을 위한 바디보드와 스노클링 기어까지… 이러한 준비는 여행 중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고 어떠한 곳을 가던지 두렵지가 않았다.
그 당시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으니 바로 비자 연장에 대한 문제였다. 이
제 시작인 것만 같았던 워킹홀리데이가 그 당시 이미 8개월째에 접어들고 있
었고 비자를 1년 연장하기 위해선 1차 산업에 3개월 이상 종사를 해야 했다.
항상 새로운 일로 가득해 지루할 틈이 없었던 호주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연장하는 것에 대한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우연치 않게 하루 묵었던 유스호스텔에서 올리브 피킹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왔다. 이상하리만치 순
롭게 일이 풀렸고 나는 바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리브 피킹은 육체적으로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묵었던 호스텔과 스보로 지역은 아무리 힘든 일이 다가와도 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이상한 운을 가진 곳이었다. 퍼스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도시에 머물며 살아가는 이웃들과의 교류도 너무 좋았지만 백패커에서 다양한 나라에서 넘어온 행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일하는 것 또한 너무도 즐거웠다. 비치하우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호스텔은 TV에서나 나올 법한 파도조차 없는 잔잔한 해변 앞에 위치해 있었고 호스텔에 묵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족처럼 친하게 지냈다. 일하러 가는 길은 상쾌했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신이 났다. 나는 그 시간들을 기억 속에 뚜렷이 남기고 싶어 그곳에 머물던 들을 인터뷰한 영상을 만들어 모두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은 에너지가 넘쳤던 작은 타운, 아름다운 경관을 바라보며 그냥 앉아만 어도 행복했던 그곳, 여행자들의 이야기가 만나고 노래가 끊이지 않았던 그곳. 던스보로. 그곳에서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 했고 웃었고 노래했다.


Mike, 초탈한 삶의 자세
던스보로에서 일을 하다가 문득 다른 곳을 여행하고 싶어졌다.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하며 가장 매력적인 것 중에 하나가 이것이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결정을 내 스스로 내리고 행동하는 것. 나는 그 당시 올리브 피킹을 했던 농장 주인에게 일주일 휴가를 요청했고 그렇게 일주일 동안 호주 남서쪽 지역을 홀로 여행하게 되었다. 이 여행에서도 많은 일들이 있었고 가장 억에 남는 여행 중에 하나로 남아있다. 여러 이야기 중에 마이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마크란 타운으로 향하던 중 지역 홍보 리플릿을 보았다. 서핑 광고가 눈에 띄었다. 던스보로에서 몇 번 도전했지만 만족할 만한 실력이 되질 못해 언젠가 정식 레슨을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광고를 보고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단지 서핑에 대한 동경이 나를 그곳에 데려다 주었지만 마이크와의 남은 서핑 너머의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화로 해변가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약 4시간 동안 그는 친절하게 서핑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레슨이 끝나고 그는 함께 더 타고 싶지만 일이 있어 가봐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혼자서라도 더 탈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한 나에게 서핑보드를 빌려준단다. 그는 집주소를 적어주고선 타고 싶을 때까지 타고 자기 집으로 보드를 갖다달라고 했다. 집에 사람이 없을 수도 있는데 집은 잠그지 않고 항상 열어놓는다며 아무도 없으면 보드는 문 앞에 두고 집 안 테이블 위에 오늘 레슨비와 보드 대여비만 놓고 가면 된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생면부지인 나에게 보드를 맡기고 레슨비도 받지 않은 채 그렇게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사람을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하기도 했고 나는 처음 만난 누군가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스로에게 전해졌다. 핑을 마치고 그가 알려준 주소로 보드를 가져다주러 갔고 나는 그의 와이프와 두 딸, 그리고 갓난아기까지 다섯 식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가족들
에게 날 소개시켜주고 자신의 집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 집은 아무것도 없던
땅에 마이크가 직접 지은 집이라고 했다. 모든 자재들은 다른 건축현장에서 남은 것들을 재활용해 지은 것이었고 서핑을 좋아하는 그의 가족답게 집안도 바다를 테마로 꾸며놓고 있었다. 짧고 강렬했던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살아가는세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West Coast Adventure
처음이 어렵다고 했던가? 난 어느새 여행에 익숙해지고 있었고 집 한 번 나
서기조차 두려워하던 처음과 달리 나는 호주 일주를 목표로 계획을 짜고 있었다. 호주 남서쪽 여행을 끝내고 다시 돌아온 퍼스에서 두 번째 비자를 신청했고 서호주를 따라 북쪽의 다윈까지 갈 계획을 만들었다. 꽤 먼 길이었기에 이번에는 여행 동료를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퍼스 백패커의 게시판마다내 여행 계획을 적은 종이를 붙이고 다녔다. 그렇게 네덜란드에서 온 얍과 독일에서 온 그레거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 셋은 그렇게 퍼스를 함께 떠났고 약 3개월가량 하루하루 24시간을 함께하며 지도 위의 가보고 싶었던 곳을 향해 전진했고 모험에 모험을 거듭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들,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단순히 목적지가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것. 이런 것이 여행의 매력이 아닐까? 절벽 앞에서 만난 웅장한 바다를 보며 자연이 주는 힘에 압도되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위대한 자연 앞에서 나는, 사람들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이기적으로 변해가는가?멜버른, 그곳에는 특별함이 있다. 서호주에서 북쪽의 다윈, 남쪽의 아들레이드를 지나 나는 어느덧 남동쪽에 위치한 멜버른에 닿게 되었다. 인생에서 조화가 필요하듯 내 워킹홀리데이 시간 동안도 여행과 정착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가 밸런스를 맞춰가고 있었다. 한곳에 너무 오래 있으면 여행 DNA가 온몸으로 퍼져 길을 떠나게 되고 여행이 기약 없이 길어지면 다시 마음에 드는 어떤 곳에 길게 머물고 싶은 마음이 강해지곤 했다. 약 반 년가량의 여행 뒤 한 곳에 잠시 정착해서 현지 생활 깊숙이 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강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머물고 싶었던 도시가 멜버른이었다. 도착 전부터 가장 기대가 컸던 도시였던 것 같다. 그 기대 이상으로 멜버른은 내 자신이 문화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던 뜻 깊은 장소였다.스튜어트 헨더슨, 호주에서는 내가 가진 그릇이 부끄러울 만큼 좋은 사람 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 잉글랜드에서 온 스튜어트는 함께 보낸 시간이 가장많은 친구였다. 나는 이 친구를 아들레이드 한 백패커 숙소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은 4일간의 캥거루 아일랜드 여행으로 이어졌고 그리고 멜버른에서는 한 집 식구가 되는 연으로 이어졌다. 나보다 먼저 멜버른으로 건너간 스튜어트가 세인트 킬다 해변 근처에 집을 구했고 내가 멜버른에 약간 머무를 계획을 알고 있던 그가 그 집에 머무를 것을 제안했다. 너무나 다른 문화에서 살아온 우리 둘은 이상하리만치 죽이 잘 맞았고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스튜어트는 같이 있는 것이 너무 편한 친구였다. 그렇게 우리는 약 5개월을 한 집에 살았고 또 약 3개월을 함께 여행했다. 국경을 초월해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되었고 함께 많은 곳을 다니고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갔다.

Concert Crew
잠시 멜버른에 머무르기 위해 나는 일거리를 찾아야 했고 한 집에 함께 머
물던 맷이 내 이야기를 듣고선 자기가 하게 될 일을 같이 해보자고 했다. 그 일이라는 것이 바로 콘서트 크루, 콘서트 장이나 각종 페스티발을 준비하고 무대를 설치하고 진행하는 일이었다. 회사 측과 이야기가 잘 되어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평소 음악을 너무나 좋아하던 나에게 그 일은 단순한 일 이상의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해외 아티스트들의 공연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고 각종 음악 축제를 비롯해 F1 레이싱 같은 세계적인 축제까지도 내 집 드나들듯이 다녔다. 이게 정녕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계속 여행을 하고 있는것인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 기회가 아니었다면 입장료의 압박으로 함부로 갈 엄두도 못 냈을 법한 행사들이리라. 일이 마냥 쉽지는 않았다. 초반 전문용어들에 익숙지 않았고 페스티발 장소에 따라 일하는 장소도 달라졌으므로 그쪽 지리에 익숙지 않았던 나에게 어려운 점이 많았다. 게다가 소통에 있어서 당연히 현지인들이나 영어권 사람들보다 미숙했으므로 불리하기도 했다. 그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선 일을 집중해서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유로움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호주에서도 성실함은 통하는 키워드였나 보다. 크루 통틀어 아시아인이 나 혼자라 겉보기에도 튀었을 텐데 묵묵히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자 초반의 배타적인 모습들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고 친근하게 말을 거는 크루들도 생겨났고 콘서트 현장에서 나를 찾는 관계자들도 생겨났다. 이 일 덕분에 나는 멜버른에서의 생활은 더욱 흥미로울 수 있었다. 그리고 단순히 이것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 한국에서도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Radio Scripter
라디오… 라디오는 내 사춘기 시절의 둘도 없는 벗이었고 소통 창구였다. 그때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나에게 있어도 라디오는 왠지 마음 한 구석
이 편안해지는 아련한 마음의 고향 같은 것으로 남아있다. 사춘기 시절 동경
의 대상이었던 그 라디오라는 무대에 서게 될 기회가 뜻하지 않게 호주 멜버
른에서 찾아왔다. 열린 마음은 행동하게 하고 그 행동은 새로운 만남을 가져
다주는 듯하다. 시작은 퍼스의 영어 학교에서 만난 ‘윤’ 형의 가벼운 제안이었다. 이 형은굴지의 국내 대기업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다가 본인의 꿈을 찾아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부인과 단 둘이 호주로 넘어왔었다. 내가 멜버른에 머물고 있을 때 마침 그 형은 그곳에서 오디오 엔지니어링 공부를 하고 있었다.
“진, 재밌는 걸 발견했어! 여기 멜버른에서 한국어 라디오 방송이 나가고있댄다. 우리 구경 가자.” 그곳은 SBS라는 방송국이었다. 대한민국 서울방송이 아닌 SBS(Special Broadcasting Service 혹은 Six Billion Stories: www.sbs.com.au)이었다. 이 방송국은 세계 60억 인구의 이야기들을 듣고 전해주는 미디어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68개 이상의 다른 언어로 송출되고 있었는데 한국어 방송도 그중 하나였다. 내가 찾아간 프로그램은 매주 일요일 한국어로 진행되던 생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멜버른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페더레이션 광장에 위치한 이곳은 건물의 생김새만으로도 매우 인상 깊은 곳이었다. 그리고 또한 매우 재미있는 스토리를 가진 곳이다. 이 광장은 차이와 통일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광장에 놓인 9개의 건물이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그 건물 하나하나에도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한편 이것은 결국 모두 같은 모듈의 파편이라는 통일의 개념을 갖고 있고 그 조각들은 무작위로 조합된 모습을 보여주며 차이와 통일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문화로부터 왔지만 각자의 이야기를 전달하거나 들을 수 있고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방송국=차이와 통일’과 같은 공식이 성립되는 공간인 것이다. 그렇게 나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휩쓸리듯이 들어갔다. 처음에는 단순히 호기심과 향수, 그리고 약간의 동경에서 비롯된 견학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생방송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방송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이렇게 워킹홀리데이로 왔다가 방송국에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다며 흥미로워했다. 그 만남은 그 당시 나에게 작은 파장을 가져다 주었고 나는 당차게도 일주일에 한 번 있던 한국어 라디오 프로그램, 즉 1시간의 생방송 안에서 5분 분량의 나만의 코너를 만들어 보겠다고 제안했다.내가 너무나도 좋아했던 형태의 미디어를 통해 나는 더 이상 청자 입장이 아닌 화자의 입장이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단 5분 정도의 시간이었고 페이도 없는 일이었지만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내 나라의 말로 내 이야기를 한다는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이 되었고 보람을 느끼게도 해주었다. 일종의 창작활동이 되어준 그 일은 내 호주 생활을 더 윤택하게 만들어주었다.

여행… 아, 여행이여…
멜버른에서 생활하는 반 년 동안 너무나도 많은 기회들과 재미있는 경험들을 했었다. 서호주가 자연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준 곳이라면 멜버른은 문화로 나를 행복하게 해준 곳이었다. 그곳에 그렇게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테지만 나는 해안선을 따라 호주 일주를 해보겠다는 계획을 마치고 싶었고 아직
도 새로운 것을 보고 만나는 것에 대한 굶주림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워킹홀
리데이의 마지막은 여행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멜버른에서 북쪽으로 길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나는 또 기대했던 것처럼 멋진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 했고 멋진 경관들을 만났고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된다. 2년 동안의 워킹홀리데이 생활 동안 얻은 가장 큰 것은 무엇보다 자아의 성숙, 그리고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 그리고 무엇보다 기대했던 것처럼 세상을넓게 보는 시야를 얻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기대 반, 그리움 반
어쩌면 이 글을 쓰기가 더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여행 중에도 글쓰기를 꽤나 좋아했던 나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받았던 느낌들을 하루하루 적어 나갔었다. 순간의 기억을 남겨주는 사진도 하나둘씩
늘어났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면 이 이야기들을 정리하리라는 계획과 함께
노트북이라는 편리한 저장매체에 담아나갔다.1년이 넘어가고 퍼스에서 또 새로운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던 어느 날, 나는 리로이의 친형 생일파티에 가게 되었고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전화기 소리에 잠이 깼다. 또 다른 이웃이자 파일럿이었던 존이었다. 존은 다짜고짜 빨리 집으로 돌아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직도 반쯤 잠에 취해 있던 나는 건성으로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내 차의 창문이 모두 박살 나 있다고 했다. 순간 뇌리를 스치는 불길함.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차에 둔 물건들이 하나씩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곧장 주차장으로 달려 나갔다. “제발 노트북만은…”이라고 외치며… 안타깝게도 역시나 노트북 가방이 통째로 사라진 뒤였다. 내 1년 동안의 기록과 사진들, 내가 담아놓은 이야기와 추억들을 잃은 것이었다. 이때의 정신적 충격은 상당히 커서 아직까지도 나는 글을 쓰거나 기록을 남기는 것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과 거부반응을 보인다. 이렇게 글을 쓰고 이 수기공모전에 지원을 하는 것도 과거의 망령을 떨쳐버리려는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행복했던 그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이 이것을 쓰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는 2년 동안 일어난 많은 사건들 중에 여기에 담을 이야기를 골라내는 일이었다. 사건들 하나하나가 너무나 재미있고 소중한 추억인데 어떤 것을 싣고 어떤 것을 빼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머리가 아프기도 했다. 또한 이 글을 쓰는 동안 그때 느끼고 깨닫고 배운것들을 다시 한국에 돌아와 생활하면서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직도 갈 길은 멀어 보인다. 많은 젊은이들이 앞날에 대해,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고 워킹홀리데이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많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고민할 시간과 에너지를 실제로 겪어보는데 사용하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그리고 워킹홀리데이를 흔히 말하는 스펙을 쌓기 위함이 아닌, 혹은 무작정 놀러 가는 것 또한 아닌 본인의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자양분이 될 수 있는, 혹은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시간으로 이해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두 가지 주의점도 얘기해주고 싶다. 너무 안타까웠던 현상 중에 하나가 한국인 젊은이들끼리 무리를 지어 테두리를 치는 일이었다. 인간이란 것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고 타지에서 모이게 되는 현상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난 그 당연함을 극복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회는 무리로 있을 때보다 개인으로 있을 때 쉽게 다가온다. 다른 한 가지, 언어…. 언어는 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상대방의 의사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 도구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무작정 가서 영어 공부를 시작하면 될 거라 생각하지만 그게 오히려 그 현지 사회와의 차단을 만들고 스스로 테두리를 만들게 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론가 떠나기로 결정했다면 가기 전에 그곳의 언어를 습득하고 간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럼으로써 당신의 워킹홀리데이는 단순한 어학연수가 아닌 진정한 워킹홀리데이의 역할을 할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행복했다. 그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문화들을 공유했기에 행복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이 있기에 행복했다. 새로운 일들을 경험했기에 행복했다. 나의 인생이 꽉 차있다는 느낌에 행복했다. 내 생각의 틀 밖에서 상황을 바라볼 기회에 행복했다. 내 여행은 끝나지 않은 것을 알기에 행복하다. 앞으로의 시간에 대한 기대가 있기에 나는 더 행복하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나갈 것임을 알기에 행복하다…. 워킹홀리데이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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